우리가 이 척박한 세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은 흔히 우리의 인생을 하나의 '길'이라는 단어로 비유하여 표현하곤 합니다. 성경의 장구한 역사 속에서도 우리의 삶을 길로 묘사하며 영적인 진리를 선포하시는 대목을 종종 마주하게 됩니다. 창세기 47장에 보면, 인생의 가장 파란만장하고 험악한 굴곡의 삶을 통과했던 야곱이 마침내 애굽의 국무총리가 된 아들 요셉의 극적인 인도로 애굽의 왕 바로 앞에 서게 되는 장면이 나옵니다. 자기가 걸어온 지난 세월을 돌아보며 야곱은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라고 담담하지만 뼈아픈 고백을 쏟아내었습니다.
야고보와 사도들의 고백처럼 우리의 인생은 나그네 길이며, 돌이켜보면 고난의 파도가 단 한 순간도 멈춘 적이 없었던 연속적인 광야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의 인생이 이처럼 참혹한 시련과 눈물만 가득한 길로 끝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비록 눈앞의 현실은 험악한 고난의 연속일지라도, 예수를 구주로 모시고 살아가는 거룩한 성도들에게는 그 고난의 터널이 결국 영원한 생명과 축복의 지경으로 연결되는 위대한 통로가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친히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선포하시며 우리 걸음걸이의 이정표가 되어주셨습니다. 한 번 살아간 인생의 길에는 반드시 지워지지 않는 영혼의 발자취가 남게 마련입니다. 해변의 모래사장 위를 걸어가면 내가 걸어온 모양 그대로 모래 발자국이 남듯이, 우리의 흔적을 바라보면 내가 그동안 환경 앞에 어떻게 반응하며 달려왔는지를 명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인생의 마지막 날 주님 앞에 서는 그 순간까지, 단 1%의 후회도 남지 않도록 반석 위에 서서 맹렬하게 신앙의 길을 달려가야 합니다.
성경 빌립보서의 기록을 보면, 인생의 종착역을 향해 끊임없이 대지를 가르며 질주했던 위대한 신앙의 마라토너가 등장합니다. 바로 감옥의 차가운 바닥에 갇혀 절망의 옥중서신을 집필하고 있던 사도 바울입니다. 내 목숨이 다하는 순교의 칼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영적으로 예견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향해 "나는 여전히 푯대를 향하여 멈추지 않고 달려가노라"고 웅장한 신앙의 외침을 토해내고 있습니다. 바울은 도대체 왜 인생의 마지막 숨결이 다하는 순간까지 이토록 최선을 다해 신앙의 레이스를 달려야만 했을까요? 그리고 오늘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은 왜 주저앉지 말고 맹렬하게 달리는 인생을 준비해야만 할까요? 오늘 우리는 사도 바울이 고독한 감옥 속에서 벼려낸 위대한 선포를 통해, 현실의 사소한 거절과 막막함의 장벽을 통쾌하게 파쇄해 버리고 내 인생을 복의 근원으로 바꾸어놓는 달리는 인생의 영적 의미는 무엇인지 깊이 있게 파헤쳐 보고자 합니다.

1. 달리는 인생은 완성형 예방주사로의 구원이 아닌, 날마다 푯대를 쫓아가는 현재진행형의 레이스입니다
우리가 멈추지 않고 달리는 신앙생활을 사수해야 하는 첫 번째 절대 명제는, 우리의 영적인 위치가 과거에 안주할 수 없는 '구원의 중간 과정' 한복판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12절에서 자신의 신앙 상태를 자로 잰 듯이 정직하게 폭로합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빌립보서 3:12)
여기서 바울이 고백한 '달려가노라'라는 단어는 원어적인 맥락을 들여다보면 사냥꾼이 맹수를 잡기 위해 끝까지 추적하거나, 단거리 경주 선수가 심장이 터질 듯이 목표물을 향해 돌진할 때 사용하는 대단히 적극적이고 맹렬한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단순히 뛰어가는 것보다, 내 온 힘을 다해 '쫓아가는 인생'이라는 표현이 훨씬 더 정확한 복음의 본질일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누구보다 삼층천 천국의 신비한 신학적 체험을 직접 경험했고 구원의 무적의 확신 가운데 살아가던 거인이었습니다. 그런 바울이 내가 이미 구원을 완성한 것이 아니요 온전히 이룬 것도 아니라고 선언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는 결코 내 구원에 확신이 없어 두려워 떤다는 뜻이 아닙니다. 구원의 완성을 향해 오늘도 예수를 닮아가고자 내 육신의 게으름을 쳐서 복종시키는 현재진행형의 거룩한 레이스를 펼치고 있다는 거룩한 고백입니다.
구원의 역사란 과거 거듭나던 순간에 한 번 마침표를 찍고 끝나는 1회성 예방주사 같은 종교적 라이선스가 결코 아닙니다. 구원은 선물로 받는 것보다, 내 삶의 치열한 전선 위에서 주님이 주신 구원의 가치를 끝까지 순종으로 사수해 내는 유지의 과정이 훨씬 더 엄중하고 소중합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던 초대교회 당시에도 "나는 이미 구원받았으니 이제 더 이상 영적인 노력이나 진보, 회개 따위는 필요 없다"고 주장하며 방종의 삶을 살아가던 이단 구원파적 사상을 가진 자들이 성전의 물을 흐려놓고 있었습니다. 만약 한 번의 고백으로 모든 영적 경주가 끝나는 구조라면 우리는 왜 매일 눈물로 기도의 제단을 지키며 예배하고 충성스럽게 헌신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수많은 사람이 과거에 뜨겁게 예수를 만났노라 자랑하지만, 정작 현실의 환란과 환란의 파도가 밀려오면 그 구원의 가치를 지켜내지 못한 채 미혹당하고 실족하여 타락의 길로 나자빠지곤 합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는 주님의 경고처럼, 주님은 과거의 화려했던 포장지가 아니라 내 인생의 가장 마지막 날에 맺혀있는 진짜 신앙의 열매를 보고 우리의 중심을 평가하십니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Forrest Gump)'를 보면 IQ 75의 지적 장애와 다리의 신체적 장애를 가진 주인공 포레스트가 등장합니다. 동네 아이들의 잔인한 왕따와 괴롭힘을 피해 여자친구 제니의 "달려, 포레스트! 달려!"라는 외침을 듣고 도망치던 어느 날, 그는 내 다리에 묶여있던 보조 장치 장벽이 산산조각 부서져 내리며 내가 세상 그 누구보다 빠르게 질주할 수 있는 위대한 달리기 재능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날 이후 그는 오직 사랑하는 제니를 향한 소망을 품고 무려 3년 2개월이라는 기나긴 세월 동안 멈추지 않고 대지를 갈라 나아갔습니다. 지치고 상한 마음에 오직 달리기 하나로 대학 미식축구의 영웅이 되고 전쟁의 영웅으로 대역전의 인생을 일구어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인생 역시 오직 내가 사랑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온 청춘을 불사르며 질주했던 거룩한 포레스트 검프의 삶이었습니다. 예수를 인격적으로 만나기 전 바울은 내 인간적인 신념과 종교적 열정에 눈이 멀어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고 정결한 성도들을 잡아 가두는 데 혈안이 되어 있던, 내 고백대로 '죄인 중의 괴수'였습니다. 예수 믿는 자들을 씨를 말리겠다는 잔인한 살기를 품고 저 멀리 이방 땅 다메섹이라는 경계선까지 맹렬하게 쫓아가던 질주였습니다. 그러나 그 다메섹 도상을 지나갈 때, 홀연히 하늘로부터 쏟아진 빛바랜 초자연적인 강력한 빛 앞에 고꾸라졌고,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하시는 전능자의 음성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그 짧은 영혼의 뒤집어지는 조우를 통해 바울의 인생 방향타는 180도 대전환을 이루었습니다. 이제는 성도들을 잡아 죽이기 위해 달리는 파괴의 인생이 아니라, 나를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땅끝까지 전파하기 위해 내 하나뿐인 목숨을 배설물처럼 내던지며 달리는 생명의 인생으로 거듭나게 된 줄 믿습니다. 바울은 인생의 마지막 단두대 앞에서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마침내 믿음을 지켜냈노라 통쾌한 승전보를 선포했습니다. 우리의 신앙 경주는 아직 진행 중입니다. 지체하거나 머물지 말고, 나를 붙드신 예수의 손에 사로잡혀 끝까지 최선을 다해 구원을 완성해 나아가는 거룩한 질주자가 되시길 소망해 봅니다.
2. 달리는 인생은 과거의 상처와 쓴 뿌리를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영원한 미래의 소망을 붙잡는 것입니다
우리가 낙심을 멈추고 맹렬하게 달리는 인생을 사수해야 하는 두 번째 영적 국면은, 지나간 과거의 아픈 기억보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예비해 두신 미래의 영광스러운 소망이 훨씬 더 소중하고 가치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13절에서 바울은 인내의 비결을 이렇게 선포합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빌립보서 3:13)
바울은 내 발걸음을 무겁게 짓누르는 '뒤에 있는 과거의 조각'들을 완전히 망각 속으로 지워버리겠다고 선언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인간에게는 지우고 싶어도 지워지지 않는 아픈 과거의 기억과 쓴 뿌리가 존재합니다. 마귀는 언제나 우리의 과거의 실패 자국, 열등감, 죄책감, 상처, 그리고 끊어내지 못한 미련과 유혹의 덫을 이용해 우리의 발목을 사정없이 묶어두려 달려듭니다. 과거의 가시덤불에 영혼이 묶여버리면 성도는 단 한 걸음도 소망의 미래를 향해 전진할 수 없게 됩니다. 과거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여러 우상 족속들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추호의 타협 없는 명령을 가볍게 여기고,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인간적인 생각으로 몇몇 우상 신상들을 남겨두고 이방 여인들과 통혼을 감행했던 부끄러운 역사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너희의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의 영혼에 올무가 되리라"고 수없이 경고하셨지만, 과거의 악한 습관과 타협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결국 그 가시에 찔려 평생을 고통과 압제 속에서 신음해야만 했습니다. 과거를 완벽하게 망각 속으로 던져버리지 않으면, 그 과거가 내 미래를 파괴하는 무서운 올무로 자라나게 된다는 엄중한 법칙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내 발목을 묶고 있는 이 지독한 과거의 상처와 현실의 막막함을 이겨내고 힘차게 앞으로 달려갈 수 있을까요? 저의 개인적인 지난 날의 치열했던 삶의 기억 속에서도, 성격상 어떤 대형 문제에 직면하면 온통 마음의 하중이 그곳에만 사로잡혀 다른 일은 단 1mm도 손에 잡히지 않아 밤잠을 설치며 괴로워했던 어두운 계절이 있었습니다. 한창 가정을 이루어 직장 생활에 온 힘을 다해 매진하던 젊은 시절이었습니다. 무역부 본부장으로 근무하며 한 달의 절반 이상을 일본 바이어들을 접대하는 고단한 업무를 수행하느라 영육 간에 피로가 극치로 누적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원래 사람들과 어울리며 술 마시는 것을 좋아하던 제 체질에는 딱 어울리는 화려한 세상 직장이었기에 내 능력을 과시하며 정신없이 세상 길을 달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몸이 납작하게 가라앉고 원인을 알 수 없는 극심한 피로감과 나른함에 이끌려 병원 정밀 진료를 받게 되었는데, 간에 거대한 대형 염증이 발생하여 당장 모든 업무를 중단하고 절대 안식을 취하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하다는 청천벽력 같은 사형선고를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하루아침에 탄탄했던 직장을 내려놓고 실직자가 되었을 때, 당장 우리 가족의 생계를 어떻게 책임져야 할지 물질의 장벽 앞에 서자 살길이 막막해 눈앞이 캄캄해졌습니다. 자나 깨나 머릿속에는 "이제 나 어떡하나, 우리 가족 굶어 죽으면 어쩌나" 하는 물질의 염려와 두려움의 찌꺼기들이 가득 차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영적인 세계에서는 내가 마주한 거대한 문제보다 훨씬 더 큰 상상할 수 없는 대형 위기가 밀고 들어오면, 지금 내가 밤새도록 고민하던 문제는 문제 축에도 끼지 못하는 아무것도 아닌 상태가 되어버리는 놀라운 신비가 일어납니다. 설상가상으로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저 멀리 타지방에서 학교를 다니며 홀로 외롭게 공부하던 제 소중한 자녀에게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환경의 위기와 자녀 문제가 쾅 터져버리는 비극이 도래했습니다.
자녀의 영혼이 무너져 신음하는 그 참혹한 소식을 들은 순간, 제가 그동안 밤새 잠 못 들며 고민하던 내 간장 질환의 통증이나 직장을 잃어버린 물질의 막막함 따위는 단 1초 만에 머릿속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내 육신의 질병은 몇 달 푹 쉬며 약 먹으면 낫는 것이고, 먹고사는 물질의 문제는 어떻게든 막노동을 해서라도 풀칠하면 되는 것이다. 오직 내 소중한 자녀의 영혼만 살아날 수 있다면, 이 자녀 문제만 해결될 수 있다면 정말 원이 없겠다" 하고 기도의 방향추가 완전히 재정렬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신실하신 이끄심 속에서 자녀의 위기가 해결될 서광의 징후가 보이기 시작했을 때, 제 영혼을 짓누르던 직장의 미련과 질병의 모든 두려움은 안개처럼 단숨에 싹 날아가 버리고 온전한 하늘의 기쁨과 감사가 샘솟았습니다. 아무리 과거의 상처가 아프고 현실의 장벽이 사방으로 가로막혀 내 발목을 잡을지라도, 예수 안에서 나를 향해 다가오시는 더 좋은 소망의 미래, 더 웅장한 하늘의 약속을 영안으로 바라보기 시작하면 과거의 모든 쇠사슬은 보혈의 능력 앞에 완벽하게 용해되어 무너져 내리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이처럼 과거를 잊어버리고 오직 내 앞에 서 계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확실한 '푯대'를 향해서 방향을 분명히 정하고 신앙의 경주를 완수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인생의 경주에서 가장 중요한 본질은 내 인간적인 열심과 속도가 아니라, 주님이 정해주신 정확한 구원의 '방향성'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향해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라고 명확한 푯대의 기준을 가르쳤습니다. 이 말씀 속에 박힌 '허공을 치는 것'이라는 표현은 권투 시합에서 유래된 신학적 비유입니다. 링 위에 올라간 권투 선수가 상대의 펀치에 맞아 힘이 다 빠지고 눈이 부어오르면, 시야가 흐려져 앞이 보이지 않게 됩니다. 눈이 감겨 앞의 타깃이 보이지 않으니, 내 주먹에 아무리 대단한 파괴력이 있어도 허공만을 향해 허탈하게 헛손질만 반복하다가 비참하게 케이오 패배를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 역시 영적인 눈이 감겨 푯대를 잃어버리면 매일 헛손질만 반복하는 허망한 종교 생활로 전락하고 맙니다. 돈이나 명예, 세상 자랑거리 따위는 있다가도 순간적으로 사라지는 안개 주소일 뿐입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오직 빛으로 오사 인생의 완벽한 해답이 되어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내 삶의 유일한 반석 푯대로 삼고, 내 이름 석 자를 쓰신 생명책의 약속을 바라보며 좌우로 치우치지 말고 전진해야 할 줄 확신합니다.
3. 달리는 인생은 선한 싸움을 마친 성도들을 위한 의의 면류관과 상급을 소망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우리가 사방의 거절감과 낙방의 피로감을 다 뚫어내고 달리는 인생을 완수해야 하는 영광스러운 종착역은, 인생의 레이스를 마친 주님의 군사들을 위하여 하늘의 보좌 위에 거대한 '하늘의 상급과 영광의 면류관'이 확실하게 예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상급을 바라보며 신앙생활을 하는 태도를 향해 지극히 기복주의적이고 유치한 초신자의 발상이라며 차갑게 비판하곤 합니다. "내가 예수 피로 구원받아 천국 문에 들어가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인데 무슨 상급을 바라고 면류관을 구하느냐"며 위선적인 영적 겸손을 떨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이 결코 성숙한 겸손이 아니며, 하늘의 상급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부름의 상을 향해 맹렬하게 쫓아가는 것이야말로 전능자의 주권을 무한 신뢰하는 정금 같은 믿음의 정석이라 가르치고 계십니다.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빌립보서 3:14)
바울이 고백한 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이라는 대목은, 고대 올림픽 마라톤 경기의 웅장한 시상식 장면을 신학적으로 비유한 최고의 명장면입니다. 무려 42.195km의 참혹한 돌짝밭 레이스를 맨발로 달려 마침내 경기장 안으로 승리자가 들어오고 최종 승자가 결정되는 순간, 온 성안에는 웅장한 황금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수만 명의 관중이 기립하여 천지가 진동하는 박수갈채를 쏟아내는 가운데, 승자는 마침내 황제 앞으로 나아가 높은 단 위에 당당하게 올라서게 됩니다. 그리고 황제의 따뜻한 다정한 음성과 함께 전 우주적인 영광의 승리자 면류관을 내 머리 위에 쓰게 되는 영광의 피날레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를 향한 유언과도 같은 편지에서 이 상급의 약속을 무쇠처럼 선포했습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디모데후서 4:7-8)
만약 마라톤 선수가 그 고단한 레이스의 끝에 아무런 영광의 시상식도 없고 단 한 톨의 상급도 예비되어 있지 않다면, 그 누구도 뜨거운 태양 볕 아래서 심장이 터져나가는 통증을 견디며 달리지 못하고 중간에 다 포기해 버렸을 것입니다. 상급이 확실하기에 우리는 넘어지고 무릎이 깨져도 다시 오뚝이처럼 일어나는 것입니다. 주님이 약속하신 이 의의 면류관은 비단 바울 한 사람만을 위한 전유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지도자 모세의 후계자였던 여호수아를 향해 약속의 땅 가안안을 수여하시며 선포하셨던 웅장한 축복의 법칙을 가만히 상고해 보십시오.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모두 내가 너희에게 주었노니" (여호수아 1:3)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가나안의 기름진 영토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무런 대가 없이 공짜로 뚝 떨어뜨려 주신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물론 주권적으로 주시겠다고 확약하셨지만, 내 발을 움직여 험악한 가나안 땅을 직접 '발바닥으로 밟아나가는 행위'는 반드시 인간 편에서 순종으로 지불해야만 하는 믿음의 대가였습니다. 순종의 대가를 지불하며 내 발바닥으로 밟고 지나가는 영역만큼만 진짜 내 소유의 복의 지경으로 주시겠다는 법도입니다. 놀랍게도 성경은 이 약속을 "내가 너희에게 주었노니"라고 확실한 완료형 과거 시제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향해 예비해 두신 축복의 자산은 이미 완료형으로 준비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핵심 본질은 내 머릿속의 다짐이나 말로만 떠드는 관념 신앙을 멈추고,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의 껍데기를 파쇄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내 삶의 실천으로 증명해 내는 순종의 발바닥을 내딛는 일입니다. 구원의 원형이란 단 한 번의 믿음의 고백으로 시작되지만, 그 구원의 평수를 확장하고 완성해 나가는 권능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온 영혼으로 굴복하는 성실한 순종을 통해서만 비로소 최고 등급으로 완공되는 법입니다. 우리가 순종의 삶을 선택하여 말씀만을 따라 전진해 나아갈 때, 주님은 우리가 밟아나가는 삶의 영토 위에 그 어떤 악한 생각의 틈새도 타지 못하도록 완벽하게 방어해 주실 것이며, 이 땅의 기름진 은혜의 축복은 물론이고 영원한 본향 천국에 예비된 영광의 면류관까지 한 톨의 누락도 없이 풍성하게 쏟아부어 주실 줄 확신합니다.
맺는 말
결론적으로 우리가 준비해야 할 진짜 참된 달리는 인생은, 내 처지와 환경의 기복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는 나약한 종교 행위가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내가 이미 모든 구원을 완성했다는 교만한 안주를 멈추고, 오늘도 나를 붙드신 예수의 손에 사로잡혀 푯대를 향해 맹렬하게 대지를 가르는 현재진행형의 레이스를 경주해야 합니다. 또한 내 발목을 묶고 있는 과거의 상처와 아픈 기억들을 과감하게 망각 속으로 지워버리고, 내 이름 석 자를 쓰신 하늘 생명책의 영원한 미래 소망을 붙잡아야 합니다. 나아가 인생의 선한 싸움을 마친 자들을 위해 하늘 보좌 위에 확실하게 예비해 두신 영광의 의의 면류관을 바라보며, 내 발바닥으로 약속의 땅을 직접 밟아나가는 순종의 제단을 사수해 내야 합니다. 흔들리는 현실 너머 내 삶의 완벽한 해답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단 하나의 무적의 푯대로 삼아 묵묵히 전진할 때, 세상을 이길 하늘의 무한한 평강과 대역전의 기적이 삶의 모든 자리마다 강물처럼 넘쳐나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내 인간적인 속도와 열심만을 의지하여 구원의 향방을 잃어버리고, 현실의 장벽 앞에서도 시야가 흐려져 허공을 치는 헛손질을 반복했던 저의 나약한 신앙을 십자가 앞에 정직하게 내려놓습니다. 과거의 삶에 안주하던 교만함을 세탁하여 주시고, 나를 붙드신 예수의 손을 바라보며 구원의 완성을 향해 오늘도 멈추지 않고 달려가는 거룩한 마라토너가 되게 하소서.
지나간 날의 모든 아픈 기억과 물질의 상처, 환경의 위기 앞에 눈물 흘렸던 상처의 쇠사슬을 보혈의 능력으로 파쇄하여 망각의 바다 속으로 지워버리게 하소서. 내 인간적인 계산기를 버리고 오직 영원한 빛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내 평생의 푯대로 삼아 흔들리지 않는 명확한 구원의 방향성을 사수하게 하소서. 달려갈 길을 마친 예배자들을 위해 하늘 보좌 위에 확실하게 준비해 두신 의의 면류관을 바라보며, 발바닥으로 약속의 땅을 직접 밟아나가는 정직한 순종을 통해 행함이 있는 살아있는 믿음의 거인이 되게 하소서. 매일의 삶 속에서 오직 말씀으로 오신 주님만을 내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동행함으로, 우리의 소망의 일터와 가정 위에 예비하신 거룩한 은혜와 대역전의 축복을 풍성하게 누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본 글은 개인적인 신앙 경험과 성경 말씀 묵상을 바탕으로 작성된 칼럼입니다. 교단이나 특정 단체에 대한 판단은 공신력 있는 교단 기관의 입장을 함께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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