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수많은 현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내 뜻과 계산대로 인생의 거친 날씨가 풀려나가지 않을 때 마주하게 되는 가장 고단하고 무거운 신앙의 과제는 단연 기도의 장벽일 것입니다. 좋으신 하나님께서는 오늘 누가복음 11장의 말씀을 통해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고 우리를 향해 거대하게 선포하십니다. 주님은 이 세 가지 점진적인 명령을 연거푸 세 번이나 강력하게 반복하시면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의 삶을 위해 숨겨두신 하늘의 가장 위대한 영적 보물을 찾아내는 기도의 법칙을 명확하게 전수해 주십니다. 기도의 명령을 세 번씩이나 중첩하여 강조하셨다는 사실은, 역설적이게도 우리가 기도의 응답을 받아 누리는 영적 질서가 그만큼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하면서도, 동시에 내 자아를 깨부수지 않고서는 도달하기 쉽지 않은 치열한 영적 전투임을 대변해 줍니다.
아주 오랜 옛날, 전 세계 영화계를 뒤흔들었던 은막의 거장 제임스 딘과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주연으로 활약했던 1956년 작 추억의 명화 '자이언트(Giant)'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이 영화 속에는 가난하고 아무런 소망도 없이 하루하루를 거칠게 살아가던 '제트'라는 이름의 별 볼 일 없는 한 건달 청년이 등장합니다. 그는 황량한 텍사스 땅에서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검은 석유 유전을 스스로 찾아내는 기적을 마주하면서, 하루아침에 온 천하를 뒤흔드는 벼락부자의 반열에 올라서게 됩니다. 그러나 내 손에 웅장한 물질의 보물이 쥐어지자마자 제트의 내면은 무섭도록 거만해졌고, 결국 끝없는 술과 탐욕의 늪에 빠져 그 누구보다 외롭고 쓸쓸하게 파멸해 가는 비극적인 인생의 종착역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 거대한 영화는 물질만능주의가 우리에게 안겨주는 화려한 보물의 실상이 얼마나 허망한 껍데기에 불과한지를 인문학적으로 날카롭게 고발해 줍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를 향해 구하고 찾고 대문을 두드리라고 말씀하시는 진짜 거룩한 진의는, 이 세상의 썩어 없어질 제트의 석유 유전 따위를 구하라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주님은 창조주가 친히 우리를 위해 성전 곳곳에 숨겨두신 영원히 마르지 않는 영적 보물, 곧 '기도의 응답'이라는 하늘의 권능을 찾아내라고 우리를 초청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성경적 기도의 법칙을 가슴속에 온전히 새기고 무릎을 꿇을 때, 비로소 눈앞의 모든 막막함을 뚫어내고 하나님이 예비하신 가장 위대한 응답의 문을 활짝 열어젖히게 될 줄 확신합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응답받는 기도의 3가지 절대적인 요소를 깊이 있게 파헤쳐 보고자 합니다.

1. 응답받는 기도는 내 이기적인 욕심을 파쇄하고, 하나님의 성품에 일치하는 선한 동기를 세우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여 하늘의 보물을 거두어들이기 위한 첫 번째 절대 원칙은, 내 기도의 밑바닥에 깔린 중심의 '동기가 선하고 아름다워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사도 야고보는 현대 성도들의 메마른 기도의 문턱을 향해 지극히 날카롭고 뼈아픈 영적 진단을 선포합니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에 쓰려고 잘못 구함이라" (야고보서 4:3)
이 웅장한 경고의 말씀처럼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밤낮으로 부르짖으며 열심히 금식하고 철야 기도의 제단을 쌓지만, 끝내 아무런 하나님의 응답을 받아 누리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내 기도의 뿌리가 순수하지 못한 정욕과 이기적인 자아의 욕심에 기반하여 잘못 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기도의 깊은 원리를 전수하시기 위해 한 가지 지극히 실제적인 비유의 이야기를 소개해 주십니다. 어느 몹시 가난한 사람의 집에, 칠흑같이 어두운 한밤중에 한 명의 소중한 친구가 긴 여행에 지친 몸을 이끌고 불쑥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오랜만에 마주한 영혼의 벗이었기에 가슴 깊이 반가움이 솟구쳤지만, 이내 가난한 주인은 참혹한 결핍의 현실과 마주하게 됩니다. 여행 중에 굶주린 친구에게 밥을 먹었느냐 물었으나 아직 한 끼도 먹지 못해 배가 고프니 떡 조각이라도 빌려줄 수 없겠느냐는 벗의 절박한 신음이 들려온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가난한 주인의 집에는 당장 먹일 양식도, 돈도 단 한 푼 남아있지 않은 절망적인 상태였습니다.
그리하여 이 가난한 자는 굶주린 내 친구를 먹여 살려야겠다는 뜨거운 자비의 동기 하나만을 품고, 그 깊은 자정이 넘은 한밤중에 체면과 수치심을 완전히 내려놓은 채 동네의 부유한 다른 친구의 대문을 찾아가 맹렬하게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본문 6절에서 그가 대문을 두드리며 외친 사정의 고백을 가만히 경청해 보십시오.
"내 벗이 여행 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누가복음 11:6)
이 절박한 한밤중의 부르짖음 속에 담긴 그의 깊은 동기는 무엇입니까? 지금 내 배를 채울 내 양식을 구하는 이기적인 욕심입니까? 결코 아닙니다. 오직 배고파 신음하는 내 이웃과 친구를 돕겠다는 긍휼과 사랑의 선한 동기 하나뿐이었습니다. 만약 그가 내 정욕을 채우기 위해 밤 12시에 남의 대문을 난폭하게 두드렸다면 당장 몽둥이찜질을 당하며 쫓겨나고 말았을 것입니다. 세상의 법원 판결에서도 범죄의 결과보다 그 범죄를 저지르게 된 '중심의 동기'를 가장 중요하게 참작하듯이, 온 우주의 재판장이신 하나님 아버지 역시 기도의 분량보다 내 마음 깊은 곳에 숨겨진 동기의 정결함을 가장 먼저 감찰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소원이 있는 것처럼, 하나님 역시 우리를 통해 이 땅 위에 이루고자 하시는 거룩한 '하나님의 소원'이 존재합니다. 그 주님의 소원을 내 영안으로 깨닫고 말씀의 약속을 붙잡아 선한 동기의 기도를 입술로 토해낼 때, 주님은 기쁨을 이기지 못하사 하늘의 보관함을 단숨에 열어주십니다.
솔로몬의 역사적인 은혜의 대목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기도의 제단 위에 불이 붙었을 때 하나님이 꿈속에 나타나사 "내가 네게 무엇을 줄까 너는 구하라"고 파격적인 프리패스 선언을 내리셨습니다. 그때 젊은 솔로몬은 세상의 명예나 왕권, 원수의 생명을 멸하는 정욕의 조건을 구하지 않고,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라고 오직 주님이 맡기신 백성들을 올바르게 섬기기 위한 '하늘의 지혜'를 선한 동기로 구했습니다. 성경은 솔로몬의 이 고백을 향해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맞은지라"라고 위대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 기도의 동기가 하나님의 생각과 정확하게 일치했다는 뜻입니다.
위대한 화가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ürer)의 불후의 명작 '기도하는 손'이라는 그림 뒤에는, 전 세계인들의 심금을 울리는 눈물겨운 선한 동기의 실화 이야기가 숨겨져 있습니다. 과거 화가의 꿈을 품었으나 집안이 너무나 가난하여 미술 공부를 지속할 수 없었던 두 소년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한 친구가 눈물을 흘리며 위대한 제안을 건넸습니다. "뒤러야, 우리가 둘 다 공부할 수는 없으니 내가 먼저 도시에 나가 막노동을 해서 네 학비를 전적으로 대줄 테니 너는 먼저 학교에 가서 열심히 그림을 배우려무나. 그리고 네가 성공하면 그 대가로 나를 나중에 공부해 다오." 친구의 거룩한 희생의 동기 덕분에 뒤러는 무사히 학교를 마쳤고 전시회를 열 만큼 위대한 화가로 명성을 얻게 되었습니다. 졸업을 앞둔 어느 날, 고마운 친구의 일터를 몰래 찾아간 뒤러는 식당 한 모퉁이에 무릎을 꿇고 거친 두 손을 모은 채 눈물로 기도하는 친구의 목소리를 듣고 그 자리에서 오열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저는 거친 노동으로 인해 손가락뼈가 다 으스러져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는 손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제 친구 뒤러만큼은 하나님의 위대한 화가가 되어 주님의 영광을 세상에 선포하게 하옵소서." 내 자아를 완전히 비워내고 이웃을 위해 향유옥합을 깨뜨린 그 정결한 기도의 손을 바라보며, 뒤러는 붓을 들어 인류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기도하는 손'을 화폭에 담아내었습니다. 우리의 기도의 중심에 하나님은 빠져있고 내 영광과 안위만을 채우려 했던 위선의 껍데기를 십자가 앞에 완전히 파쇄해 버리십시오. 내 기도의 동기가 선하신 하나님의 마음과 정확하게 일치될 때, 비로소 하늘의 보물 문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2. 응답받는 기도는 내 형편과 필요를 하나님 앞에 숨기지 않고, 명확하고 구체적인 내용을 아뢰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을 대면하여 응답의 보물을 거두어들이기 위한 두 번째 기도의 원칙은, 내 간구의 문장 속에 뜬구름 잡는 애매모호함을 걷어내고 '구체적이고 분명한 기도의 내용'을 준비하는 일입니다. 본문 5절에서 밤중에 부자 친구의 대문을 두드린 가난한 이웃은 주저 없이 명확한 꼬리표를 제시합니다.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꾸어 달라" (누가복음 11:5)
그는 단순히 "나 배고프니 먹을 것 좀 아무거나 적당히 주시오"라고 얼버무리지 않았습니다. 내 집에 찾아온 배고픈 친구의 굶주림을 완벽하게 해결해 줄 수 있는 정확한 분량인 '떡 세 덩이'라는 숫자를 자로 잰 듯이 구체적이고 선명하게 요청했습니다. 이처럼 내용이 분명한 정석 기도를 드렸기에, 그는 내일 아침이 되기 전 정확하게 떡 세 덩이라는 알맹이 응답을 손에 거머쥐게 되었습니다. 필요 이상을 탐하는 내 이기적인 욕심을 파쇄해 버리고, 내 삶에 당장 필요한 결핍의 문제를 정직하고 분명하게 하나님 앞에 날것 그대로 아뢰는 기도가 진짜 능력 있는 기도입니다.
물론 어떤 이들은 마태복음 6장 8절의 말씀처럼 "우리가 구하기 전에 우리에게 있어야 할 모든 것을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이미 다 알고 계시지 않느냐"고 반문하며 기도의 무용론을 펼치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내 사정을 다 알고 계시는데 왜 구차하게 입술로 일일이 분명하게 아뢰어야 하느냐는 핑계입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형편을 다 알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입을 열어 구체적으로 기도하라 명령하시는 진짜 영적인 본심은, 기도를 매개체 삼아 피조물인 저와 여러분과 가장 친밀한 영혼의 교제를 나누기를 갈망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기도를 통해 우리를 만나주시고, 주님과 내가 단단한 언약의 연합을 이루어 마침내 내 삶의 구체적인 응답을 통해 창조주 홀로 영광 받으시는 소망의 성취를 이루길 원하십니다.
성경의 역사 속에서 주님의 마음에 가장 합당한 기도의 내용을 올려드렸던 위대한 인물은 단연 다윗 왕이었습니다. 시편 속에 절절히 흐르는 다윗의 간구 내용들을 가만히 묵상해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도무지 응답해 주시지 않을 수 없도록 내 사정과 원수들의 위협을 자로 잰 듯이 구체적인 활자로 아뢰고 있음을 목도하게 됩니다. 다윗이 설계한 위대한 시편의 기도는 언제나 '감사와 찬양, 그리고 명확한 간구'라는 3대 영적 기둥 서식이 황금 대칭을 이루며 완벽하게 정렬되어 있었습니다. 우리의 기도 내용 역시 뜬구름 잡는 막연함을 십자가 앞에 완전히 세탁해 버리고, 내 결핍의 주소를 주님 발치 앞에 정직하고 선명하게 아뢰어 기쁨으로 응답을 수확하는 은혜를 경험하면 좋겠습니다.
3. 응답받는 기도는 내 자존심의 껍데기를 완전히 비워내고, 부끄러움이 없는 겸손함으로 끝까지 강청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우리가 사방의 침묵과 거절의 장벽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기도의 보물을 내 품에 안기 위한 절대적인 요소는, 내 자존심의 장벽을 완전히 허물어버리는 '부끄러움 없는 간절한 강청함'의 자세입니다. 비유 속의 가난한 사람은 한밤중에 큰마음을 먹고 대문을 두드렸으나 안에서는 단 한 톨의 반응도 들려오지 않았습니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괜히 왔나 하는 깊은 수치심과 창피함이 밀려와 당장이라도 집으로 도망치고 싶은 인간적인 절망의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배고파 신음하는 친구의 얼굴을 떠올리며, 그는 내 인간적인 자존심의 포장지를 과감하게 찢어버린 채 대문이 부서져라 더 세차게 문을 두드리며 목이 터져라 "친구여 떡 세 덩이를 주시오!"라고 외쳐대기 시작했습니다. 잠자리에서 깨어난 부자 친구가 "제발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소에 누웠으니 일어날 수 없노라" 매정하게 거절의 방어벽을 쳤지만, 그는 대문 빗장을 붙잡고 늘어지며 밤새도록 대지를 뒤흔들며 강청했습니다. 마침내 주님은 이 기도의 피날레를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 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 (누가복음 11:8)
이 위대한 선포 속에 박힌 '강청(간청)'이라는 단어는 원어적인 진의를 파헤쳐 보면 '부끄러움도 모르는, 뻔뻔스러운 자존심이 없는 상태'라는 대단히 좋지 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온 우주의 왕이신 예수께서 기도의 비결을 전수하시면서 왜 이토록 부끄러움도 없는 뻔뻔한 강청함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계실까요? 그것은 바로 살아 계신 하나님 아버지 보좌 앞에 나아와 영원의 축복을 구하는 예배자는, 내 알량한 세상의 체면이나 자존심, 내 경험의 포장지 따위는 십자가 앞에 완전히 장착 해제해 버리고 오직 전능자 한 분만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철저한 영적 맨발의 겸손을 준비해야 함을 뜻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기도의 동기가 선하고 내용이 정교할지라도, 내 자존심을 꼿꼿이 세운 채 형식적으로 중언부언하는 나약한 기도는 하늘의 응답 주기에서 제외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주님은 연이어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동일한 기도의 절대 법칙을 점진적으로 세 번씩이나 반복하여 쐐기를 박으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간절한 강청의 태도를 통해 우리의 믿음의 진짜 진정성의 깊이를 확인하십니다.
과거 어느 신실한 어머니가 방탕하여 교회를 떠난 사랑하는 외아들의 영혼 구원을 위해 밤낮으로 눈물 흘리며 강청 기도의 제단을 사수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들은 어머니의 간절한 눈물을 비웃기라도 하듯 끝내 주님 앞에 돌아오지 않은 채 군대에 입대해 버렸습니다. 군대 안에서도 어머니가 매주 보내오는 편지 속에 "교회에 나가 예수를 믿으라"는 눈물의 권면이 가득 차 있자, 아들은 지독한 짜증을 내며 어느 날 배달된 어머니의 편지를 방바닥에 거칠게 내던지며 분노했습니다. 편지 속에는 "내 아들아 이 글을 보거든 지금 당장 조용한 곳으로 가서 네 어머니의 하나님께 예수를 영접하겠노라 기도를 드려다오"라는 어머니의 애끊는 마지막 강청의 소원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날 이후 매주 오던 어머니의 편지가 차갑게 뚝 끊어졌고, 이내 어머니가 지병으로 소천하셨다는 청천벽력 같은 전보 한 장이 군부대 관사 안으로 날아들었습니다. 가슴이 산산조각 깨어지는 참혹한 죄책감과 자책감에 휩싸인 아들은, 비로소 어머니의 마지막 강청의 소원을 이루어드리기 위해 군부대 뒤편 캄캄한 숲속 흙바닥 위에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습니다. 그리고 평생 나를 위해 부끄러움 없이 강청했던 어머니의 하나님을 향해 통곡의 눈물을 터뜨리며 마침내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여 새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어머니의 눈물 어린 강청의 기도가 마침내 한 영혼을 살려낸 기적의 실상입니다.
우리의 기도의 동기와 구체적인 내용을 준비하여, 자존심을 버리고 주님 보좌 앞에 끝까지 부끄러움 없이 매달려 하늘의 영원한 응답 보물을 남김없이 거두어들이는 기도의 거장들이 되시기를 바니다.
맺는 말
결론적으로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예비된 하늘의 무한한 보물을 거두어들이는 비결은, 내 환경과 기복에 따라 표류하는 미숙한 종교 행위가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내 이기적인 정욕의 계산기를 십자가 앞에 완전히 파쇄해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마음에 쏙 드는 정결하고 선한 동기를 기도의 뿌리에 심어야 합니다. 또한 뜬구름 잡는 막연함을 세탁하여 내 결핍의 주소를 주님 발치 앞에 떡 세 덩이처럼 명확하고 구체적인 내용으로 아뢰어야 합니다. 나아가 내 알량한 체면과 세상 자존심의 껍데기를 과감하게 찢어버리고 오직 전능자 한 분만을 붙잡아 부끄러움이 없는 맨발의 겸손으로 끝까지 강청하는 기도의 제단을 사수해 내야 합니다. 내 약함을 정직하게 시인하며 전적으로 창조주를 신뢰할 때, 주님은 우리의 가슴을 치는 강청의 고백을 보시고 우리 앞길의 모든 다쳐진 장벽을 산산조각 깨부수어 주실 것이며, 세상이 감히 줄 수 없는 아빠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와 대역전의 최종 승리 축복이 삶의 모든 자리마다 거대하게 강물처럼 쏟아져 내릴 줄 믿습니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내 인간적인 욕심과 정욕만을 가득 채운 채 형식적으로 중언부언하며 기도의 향방을 잃어버렸던 저의 부끄러운 위선의 껍데기를 십자가 앞에 정직하게 자복하며 내려놓습니다. 나를 위해 평생을 헌신했던 친구의 기도하는 손을 바라보며 붓을 들었던 뒤러의 이야기처럼, 내 이기적인 계산기를 완전히 세탁하여 오직 선하신 하나님의 기쁨과 소망이 내 기도의 정결한 뿌리가 되게 하소서. 뜬구름 잡는 막연한 종교 생활을 멈추게 하시고 내 결핍의 주소를 주님 보좌 앞에 떡 세 덩이처럼 명확하고 구체적인 내용으로 아뢰어 주님과 가장 친밀한 영혼의 사귐을 회복하게 하소서.지금 이 순간에도 내 작은 신음에 자비함으로 귀를 기울이시는 신실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본 글은 개인적인 신앙 경험과 성경 말씀 묵상을 바탕으로 작성된 칼럼입니다. 교단이나 특정 단체에 대한 판단은 공신력 있는 교단 기관의 입장을 함께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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