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유한한 인생의 걸음걸이를 걸어가면서, 우리의 평범한 삶 속에서 수많은 형태의 인연과 만남을 경험하며 살아갑니다. 세상에 처음 태어나는 순간 우리는 부모라는 고귀한 존재를 만나게 되고, 자라나면서 친척과 친구, 일터의 수많은 동료와 스승을 마주하게 됩니다. 더 나아가 인생의 가장 소중한 동반자인 배우자를 만나 가정을 이루고, 예수를 믿고 거룩한 교우들과 영혼의 목자들을 만나는 축복을 누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인류 역사와 복음의 진리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가장 경이롭고 위대한 만남의 정점은, 단연 온 우주의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대면하는 순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남으로 인하여 우리의 깨어지고 상했던 이전의 옛 인생은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의 인생으로 위대하게 대전환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장구한 역사 속에는 이처럼 창조주를 만나 영혼의 뒤집어지는 은혜를 경험했던 선진들의 눈물어린 고백이 가득 차 있습니다.
성경 출애굽기 3장의 기록을 보면, 하나님 아버지와 영혼의 지도자 모세와의 가슴 터질 듯한 역사적인 만남의 순간이 웅장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만남은 하나님께서 오랜 세월 인내하며 기다리셨던 순간이었고, 모세 역시 내 머릿속에서 언젠지는 알 수 없지만 막연하게 갈망하며 기다려왔던 인생 최대의 결정적 타이밍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처음 모세를 태중에서부터 부르시고 당신의 거룩한 뜻을 이 땅 위에 이루실 최고의 도구로 계획하셨지만, 젊은 시절 혈기왕성하여 내 힘과 주먹으로 세상을 바꾸려 버둥거리던 미숙한 모세를 그대로 가져다 쓰실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주님은 화려했던 애굽의 왕자 자리를 단숨에 폐하시고, 그를 아무것도 없는 척박한 미디안 광야 한복판으로 밀어 넣으사 양 떼의 뒤를 쫓는 쓸쓸한 목동으로 무려 4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연단과 훈련의 과정을 거치게 하셨습니다. 사방이 가로막힌 고난의 학교에서 외로움의 빵을 먹으며 내 자아의 껍데기를 깨부수는 처절한 낮아짐의 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부서진 중심을 고쳐 쓰시는 좋으신 아버지이십니다. 주님은 오늘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역시 진리의 말씀으로 양육하시고, 여러 연단의 과정을 통해 가장 정결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날마다 다듬어가고 계십니다.

1. 낮아진 자를 찾아오시는 하나님: 광야의 한복판에서 자아의 혈기를 세탁하는 은혜
우리가 성경의 역사 속에서 모세처럼 살아 계신 하나님을 뜨겁게 만나 그분의 돌보심을 누리기 위한 첫 번째 절대 법칙은, 내 교만의 포장지를 십자가 앞에 과감하게 꺾어버리는 '낮아짐의 겸손'을 준비하는 일입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하나님과 모세와의 위대한 만남은 결코 어쩌다 마주친 우연한 해프닝이 절대 아니었습니다. 과거 모세는 최고의 지성과 군사력을 소유했던 애굽 왕궁의 왕자 신분이었지만, 내 힘과 혈기만으로 동족을 돕겠다며 사람을 쳐 죽인 비참한 살인자가 되어 동족들에게도 차갑게 버림받은 채 야반도주를 감행해야 했던 철저한 실패자였습니다.
그리하여 흘러 들어온 미디안 광야에서 무려 40년이라는 장구한 고난의 터널을 지나면서, 왕자 시절의 그 당당했던 자부심과 화려한 스펙은 안개처럼 싹 사라졌고, 그의 내면 중심에는 지독한 공허함과 무기력함만 남아 그저 매일 아침 황량한 하늘만 쳐다보며 신음하는 쓸쓸한 노년의 신세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좋으신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주류 무대에서 버림받은 그 척박한 광야의 한복판 속에서, 모세의 자아가 가장 정결하게 부서진 바로 그 타이밍에 그를 만나주셨습니다. 황량하기 짝이 없던 절망의 비탈길 호렙산 중턱이, 역설적이게도 하나님을 마주하고 사명의 은혜를 입는 우주에서 가장 거룩한 지성소의 처소로 거듭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은 우리의 신앙생활과 일터의 현장 위에서 나를 지켜내는 유일무이한 거룩한 관건이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실체로 대면할 때 비로소 그리스도 안에 숨겨진 십자가의 위대한 비밀을 깨닫게 되고, 내 환경을 초월하는 하늘의 풍성한 죄 사함과 영원한 자유함의 기쁨을 온몸의 전율로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향해 이 십자가 비밀의 영광을 위대하게 선포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에베소서 1:7-9)
이 말씀의 진리처럼 하나님이 베푸시는 대역전의 비밀은, 내 힘과 의로 가득 찬 교만한 자가 아니라 내 철저한 연약함을 인정하며 낮아진 겸손한 심령에게만 선물처럼 찾아오게 마련입니다. 40년 동안 광야의 겨울을 지나며 교만의 핏기가 완전히 세탁된 모세에게 찾아오사 새 출발을 선언하신 하나님은, 오늘 밤 현실의 사소한 거절과 낙방의 하중 때문에 마음이 낮아져 있는 우리의 성전 한가운데에도 똑같이 찾아오사 살아 계신 실체로 만나주실 줄 확신합니다. 하나님은 내 스펙을 자랑하며 목을 꼿꼿이 세우는 자를 대적하시고, 오직 내 연약함을 정직하게 고백하며 엎드리는 겸손한 자에게 하늘의 무한한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기독교 복음의 진짜 위대한 본질은 내 고집을 꺾고 아래로 내려가는 역설의 겸손에 있습니다. 온 우주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친히 허리에 허름한 수건을 두르시고 제자들의 더러운 발을 손수 씻기시며 섬김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늘의 질서는 세상의 피라미드식 계급이나 화려한 서식 간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자아를 낮추어 주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진정성의 깊이에 달려 있습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주님이 친히 보좌 위로 높여주실 줄 믿습니다. 오늘 모세가 서 있던 그 황량한 호렙산의 비탈길, 아무런 소음도 들리지 않는 깊은 고요함의 광야 한가운데서 하나님은 타오르되 꺼지지 않는 불꽃의 신비로운 임재로 모세의 시선과 관심을 서서히 끌어당기기 시작하셨습니다.
2. 자기 신발(생각)을 벗은 자를 찾아오시는 하나님: 인본주의 계산기를 버리고 주의 주권에 굴복하는 결단
사방이 타오르는 신비로운 불꽃을 보고 모세가 발걸음을 돌이켜 가까이 다가오자,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40년의 침묵을 깨부수고 다급하게 그의 이름을 두 번 연거푸 불러내셨습니다. "모세야, 모세야!" 창조주의 세밀한 음성이 광야의 소음을 뚫고 들려왔을 때, 모세는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오랜 세월 갈망해왔던 간절한 고백으로 대답했습니다. 마침내 호렙산의 웅장한 대역전의 만남이 시작되는 찰나,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향해 지극히 뜻밖의 명령을 내리십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출애굽기 3:5)
평생을 광야에서 발을 보호하며 살아온 모세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당황스러운 주님의 요구였습니다. 하나님은 왜 모세를 향해 가장 먼저 '네 신을 벗으라'고 명령하셨을까요? 인류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 머물던 시절에는 그 어떤 신발도 신었다는 기록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창조주가 지으신 정결한 낙원 위를 아무런 가식이나 장벽 없이 맨발로 거닐며 동행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먹지 말라 명하신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 앞에 범죄하자, 그들은 내면의 수치와 두려움을 발견하고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해 입었습니다. 햇빛에 금방 말라버리는 나약한 인간의 방편을 보시고, 하나님은 짐승을 잡아 피 흘림의 상징인 가죽옷을 친히 지어 입혀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인간의 부끄러움을 가리는 것은 주님이 지어주신 가죽옷 하나면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거친 황무지와 들판을 살아가게 된 인간은, 내 몸을 내 힘으로 보호하겠다는 목적으로 스스로 '신발'을 만들어 신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가죽옷은 하나님이 부어주신 은혜의 산물인 반면, 신발은 내 힘과 '인간의 생각'으로 짜내어 만든 인본주의의 상징인 셈입니다. 인간은 주님의 품을 떠나 내 생각과 고집대로 살아가기 시작하면서 하나님과 한없이 멀어지게 되었고, 내 머릿속에는 온갖 이기적인 자기 생각의 찌꺼기들이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루를 바쁘게 살아가면서 뇌리 속에 스쳐 지나가는 수만 가지 생각 중 대부분은 주님의 뜻이 아니라 오직 내 안위만을 걱정하는 '나 중심의 생각'일 뿐입니다. 이 완고한 자기 고집이 결국 거대한 인본주의가 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바벨탑이 되어 사방으로 흩어지는 비극을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과거 학창 시절의 경험 중에서, 이 인간의 이기적인 자기중심적 생각을 너무나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웃지 못할 에피소드가 하나 있었습니다. 하루는 친구들과 함께 동네 설렁탕집에 가서 음식을 주문했는데, 서빙하시는 아주머니가 뜨거운 뚝배기 그릇을 들고 나오시는데 가만히 보니 아주머니의 엄지손가락이 설렁탕 국물 한가운데에 푹 잠겨 있는 것이었습니다. 위생적으로 너무나 불결하고 당황스러워서 우리가 깜짝 놀라 "아줌마, 손가락이 국물에 다 들어가 있으면 어떡해요!"라고 항의를 했습니다. 그러자 그 아주머니가 우리를 슥 바라보며 던진 대답이 점입가경이었습니다. 아주머니는 아주 태연한 목소리로 "에이, 괜찮아. 난 안 뜨거워"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음식을 먹어야 하는 이들의 위생과 심정은 단 1%도 배려하지 않은 채, 오직 내 손가락이 뜨겁지 않으니 아무런 염려를 하지 말라는 황당무계한 '자기중심적 고집'이었습니다. 오늘날 사방에서 다툼과 분열을 겪는 현대 성도들의 내면 상태가 바로 이 아주머니의 태도와 다르지 않습니다. 상대방의 영혼의 상처와 아픔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내 입장만을 내세우며 내 생각이 무조건 옳다고 우겨대는 지독한 인본주의의 실상입니다. 주님이 모세를 쓰시기 전 가장 먼저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선포하신 진짜 거룩한 본심은, 지난 40년 동안 네 몸에 덕지덕지 묻어있던 네 이기적인 현실의 생각과 고집의 때를 완전히 장착 해제하고,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 전적으로 굴복하라는 강력한 사랑의 다짐이었습니다.
출애굽기 3장과 4장의 기나긴 대화를 보면 모세는 온통 내 한계와 내 처지만을 바라보며 "나는 본래 말이 서툰 사람입니다, 그들이 내 말을 듣지 않을 것입니다"라며 철저하게 자기 생각의 고집을 꺾지 못했습니다. 변명의 핑계 속에는 언제나 '내가, 내가, 내가'라는 자아의 중심성이 요새를 구축하고 있었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신었던 그 신발은 내 발의 보호 수단이자 내 경험의 결정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 인간적인 경험과 지식을 의지하는 그 신발을 신고는 결코 거룩하신 전능자 앞으로 단 한 발자국도 걸어 나올 수 없다고 단호하게 선포하십니다.
나아가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평생 양을 칠 때 의지했던 낡은 나무 지팡이를 바닥에 내던지라고 명령하셨고, 그 지팡이가 뱀으로 변했다가 다시 꼬리를 잡았을 때, 성경은 그 지팡이를 향해 더 이상 모세의 지팡이라 부르지 않고 '하나님의 지팡이'라는 권능의 간판을 달아주었습니다.
"모세가 그의 아내와 아들들을 나귀에 태우고 애굽으로 돌아가는데 모세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더라" (출애굽기 4:20)
모세가 내 경험과 능력이라는 인간의 지팡이를 내려놓았을 때, 그 지팡이는 온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권능이 임하는 초자연적인 통로로 위대하게 대전환을 이루어 홍해 바다를 가르고 반석에서 생수를 내는 기적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오늘 밤 내 상식과 환경을 바라보던 부정적인 생각의 신발을 완전히 벗어버리고 오직 성령 안에서 의도적으로 주님의 약속만을 묵상하며 나아갈 때, 우리의 무력한 인간의 지팡이는 전능자의 지팡이로 변화되어 인생의 거대한 대역전 승리를 거두어들이게 될 줄 확신합니다.
3. 하나님의 거룩함에 들어온 자가 누릴 수 있는 은혜: 세상 신을 벗고 전능자의 임재 안에서 누리는 영원한 동행
우리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나누는 만남의 은혜가 가장 아름다운 형태로 성취되는 마지막 절대 구역은, 세상의 더러운 오물과 먼지를 묻히고 다니던 내 발의 신발을 완전히 벗어버리고 오직 주님의 '거룩함에 들어온 자'가 되어 그 임재를 누리는 순간입니다. 타락한 인간이 죄악된 자아를 품은 채 거룩하신 전능자를 대면하게 되면 그 웅장한 거룩함의 임재 앞에 즉사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주님은 모세의 생명을 보호하시고 당신의 정결한 축복을 안겨주시기 위해 가장 먼저 신을 벗으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사실 서양의 입식 문화권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집안에서도 신발을 신은 채 생활하기 때문에 이 신을 벗는 거룩한 행위를 온전히 이해하기가 쉽지 않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정갈한 좌식 문화를 지켜온 우리 동양의 정서 속에서는, 바깥세상의 온갖 더러운 오물과 먼지를 밟고 다니던 그 신발을 신고 신성한 집안까지 그대로 밟고 들어오는 행위는 용납될 수 없는 불결한 행동입니다. 과거 우리의 옛 교회 예배당들이 대부분 마루에서 신발을 정갈하게 벗고 맨발로 성전 안으로 걸어 들어갔던 구조였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신발을 벗고 들어가는 조용한 예배당 좌식 마룻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보면, 내 안의 분요했던 세상 소음이 단숨에 차단되면서 오직 주님의 거룩한 성전 기둥에 온 영혼이 안전하게 붙들린 듯한 하늘의 거대한 평안과 안식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내 발에서 신을 벗어던진다는 진짜 영적인 진의는, 방관자처럼 주님 바깥세상 경계선에 서서 상황을 저울질하며 살피는 나약함을 멈추고, 좋으신 하나님 아버지의 품 안으로, 그리스도 보혈의 대속 안으로 내 온 삶을 던져 완전히 걸어 들어오는 인격적인 순종을 뜻합니다. 오늘날 수많은 현대 그리스도인이 거룩한 성전 마당 밟기를 반복하면서도 영혼의 진짜 안식과 부흥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내 마음 중심에는 여전히 세상의 탐욕과 물질의 신발을 그대로 신은 채 예배를 드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네 신을 벗고 내 거룩함으로 들어오라, 네 생각을 내려놓고 내 즐거움에 참여하라는 초청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모든 계산기 신발을 벗어 던지고 주님의 거룩함 속으로 걸어 들어올 때, 전능자께서는 우리의 평생의 일터와 삶의 지경을 책임지시는 위대한 대역전의 약속을 선포하십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출애굽기 3:12)
모세가 내 이성의 신발을 완전히 벗어 던지고 맨발의 무력한 존재가 되어 주님 앞에 납작 엎드렸을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는 그 부서진 중심 한가운데로 찾아오사 세상을 뒤흔들 출애굽의 위대한 사명을 부어주셨습니다. 모세의 존재 가치가 아니라, 오직 단 한 문장, 온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전능하신 존재 실상'만을 그의 심장 속에 쾅 인쳐 주셨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할게. 내가 너와 영원히 동행하겠다!"
우리가 하나님과 만남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겸손함으로 낮아져서 자기 신을 벗고 순종하면 되는 것입니다. 나의 존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한 자리, 예배의 자리, 말씀의 자리에 나아가면 그 다음은 우리 마음을 어루만져 주시고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으로 채워주시는 하나님이 친히 행하십니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서 가장 먼저 내 신발을 벗어 던지는 거룩한 순종의 첫 단추를 꿰었을 때, 이후 그 말씀의 법을 전수받아 광야로 걸어 나왔던 수백만 이스라엘 백성들의 일상 속에는 사십 년 동안 신발 한 짝 해어지지 않고 발가락 하나 부르트지 않는 초자연적인 신비한 기적의 보호하심이 흘렀습니다.
"주께서 사십 년 동안 너희를 광야에서 인도하셨거니와 너희 몸의 옷이 낡아지지 아니하였고 너희 발의 신이 해어지지 아니하였으며" (신명기 29:5)
내가 내 힘으로 발을 보호하겠다며 신었던 인간적인 계산기 신발을 주님 앞에 벗어 던졌더니, 하나님께서는 도리어 40년이라는 참혹한 광야의 돌짝밭 길 속에서도 옷 한 벌 낡아지지 않고 신발 한 짝 해어지지 않도록 초자연적인 하늘의 요새로 온 삶의 지경을 완벽하게 동행하며 덮어주신 것입니다. 내 약함을 정직하게 시인하며 세상 신발을 벗어 던지고 주님의 거룩한 예배의 자리로 들어오는 우리의 중심을 보시고, 좋으신 아빠 하나님께서는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하리라, 내가 너를 영원히 승리케 하리라" 약속의 마침표를 사정없이 찍어주실 것을 확신합니다.
맺는 말
결론적으로 우리가 드려야 할 진짜 참된 신앙생활의 원형은, 내 감정과 환경의 기복에 따라 이리저리 표류하는 미숙한 종교 행위가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매일 지겹도록 땀 흘려야 하는 척박한 미디안 광야 같은 일터 한복판에서, 내 경험과 의지를 보호하려 신었던 이기적인 자기 생각의 신발을 과감하게 벗어 던지기를 간절히 원하고 계십니다. 설렁탕 그릇에 손가락을 담그고도 나만 괜찮다고 외치던 그 완고한 아주머니의 태도처럼, 내 입장만을 고집하며 "왜 내 뜻대로 열매가 안 맺히는가" 주님을 원망하던 불신앙의 계산기를 십자가 앞에 완벽하게 파쇄해 버리십시오. 모세가 내 낡은 지팡이를 바닥에 내던졌을 때 그것이 홍해를 가르는 하나님의 지팡이가 되었고, 내 발에서 신을 벗고 주님의 거룩한 안식 속으로 온전히 걸어 들어갔을 때 사십 년 광야 길 동안 신발 한 짝 해어지지 않는 초자연적인 형통의 기적이 임했습니다. 매일의 삶 속에서 내 교만의 신을 벗고 전능자의 임재 안으로 걸어 들어감으로, 세상이 감히 줄 수 없는 위대한 대역전의 인도하심을 누리는 우리가 되길 소망해 봅니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내 이성과 인간적인 경험의 지팡이만을 굳건히 쥐고 내 발을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 만들어 신었던 이기적인 자기 생각의 신발을 이 시간 십자가 앞에 정직하게 자복하며 완전히 벗어 놓습니다. 설렁탕 그릇에 손가락을 담그고도 내 생각만 옳다고 우기던 무지한 삶의 태도를 멈추게 하시고, 40년 동안 광야의 고난의 학교를 통과하며 철저하게 낮아져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겠습니까" 고백했던 모세의 정직한 겸손함을 내 영혼의 옷으로 삼게 하소서.
내 얄팍한 경험과 의지가 묻어있는 인간의 지팡이를 주님 보좌 앞에 과감하게 내던지게 하사, 홍해 바다를 가르고 반석에서 생수를 내며 대적 아말렉을 단숨에 물리쳤던 능력의 하나님의 지팡이를 내 손에 굳건히 쥐게 하옵소서. 바깥세상의 더러운 먼지와 오물을 묻힌 신발을 벗어 던지고 오직 주님의 거룩한 임재 안으로, 그리스도 보혈의 대속 안으로 완전히 걸어 들어가게 하사 사십 년 광야 길 동안 옷 한 벌 낡지 않고 신발 한 짝 해어지지 않게 하셨던 초자연적인 하늘의 보호하심과 형통함을 매일 마주하게 하소서. 내 생각과 고집을 버리고 오직 말씀으로 오신 주님만을 내 삶의 가장 맨 앞자리에 모시고 동행함으로, 다가오는 새 주간 내 소망의 일터와 가정 위에 폭포수처럼 부어주실 거룩한 은혜와 회복의 기적을 누리는 명품 인생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본 글은 개인적인 신앙 경험과 성경 말씀 묵상을 바탕으로 작성된 칼럼입니다. 교단이나 특정 단체에 대한 판단은 공신력 있는 교단 기관의 입장을 함께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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