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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칼럼

매번 죄와 타협하며 무너지는 당신에게, 주님이 건네시는 세밀한 사귐의 은혜

by medition604 2026. 9. 15.

우리가 척박한 인생의 무대 위를 걸어가면서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 가슴 한구석이 뻥 뚫린 듯한 지독한 고독감과 영적인 갈증을 마주할 때가 참 많이 있습니다. 뜨겁게 찬양하고 열심히 종교적인 봉사의 자리를 지켜내지만, 내 내면의 깊은 골방 속에는 정작 하나님과의 거리가 한없이 멀게만 느껴지는 서글픈 영적 소외감입니다. 많은 현대 그리스도인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어떻게 친밀하게 동행해야 하는지 그 방법을 몰라 겉도는 종교 행위만을 반복하곤 합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의 역사 속에서 주님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호흡했던 사도 요한은, 우리가 하나님과 맺어야 할 진짜 신앙의 본질을 인간의 관념을 뛰어넘는 지극히 따뜻하고 선명한 한 단어로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그것은 바로 '사귐'이라는 단어입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의 문을 열며 모든 세대의 성도를 향해 이 영광스러운 영적 비밀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사귐은 단순히 종교적인 규칙을 지키는 딱딱한 의무가 아니라, 온 우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 아버지와 그분의 독생자 주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으로 만나 동행하는 위대한 우정이자 교제라고 명확하게 정의합니다. 이 사귐이라는 단어는 원어로 '코이노니아'라고 부르며, 서로의 심장을 공유하고 삶의 모든 조각을 친밀하게 나누는 소통의 상태를 뜻합니다. 오늘 우리는 거친 세속의 파도 속에서 영혼의 중심을 잃고 방황하는 현대인들을 향해,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어떻게 가장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사귐의 방으로 들어가 내 메마른 하루하루를 창조주가 부어주시는 안식과 빛의 은혜로 가득 채워낼 수 있는지' 그 신비롭고 웅장한 영적 원리를 말씀을 통해 깊이 있게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품에 있는 요한
예수님의 품에 있는 요한

 

1. 사귐은 광야 같은 세상에서 매번 무너질 때, 주님의 품에서 시작됩니다

성경은 우리가 딛고 살아가는 이 세상을 향해 지독하고 처절한 '광야'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곤 합니다. 요한일서가 기록될 당시나 지금 우리가 발을 딛고 서 있는 현실의 일터나, 하나님의 백성들이 마주하는 세상의 영적인 지경은 결코 평탄한 낙원이 아닙니다. 세상은 시간이 흐를수록 공중 권세 잡은 세상 가치관 아래 급격하게 함몰되어 가고 있으며, 그로 인해 영적인 어둠과 지독한 세속화의 소음은 날이 갈수록 더 악하고 짙어지고 있는 것이 차가운 현실입니다. 그러나 농부가 가라지가 사방으로 무성하게 자라날 때 그 틈바구니 속에서 묵묵히 알곡의 성장을 기다리는 것처럼, 세상의 영적 척박함이 심해질수록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정결한 성도들의 진짜 믿음의 가치는 밤하늘의 보석처럼 더욱 찬란하게 빛을 발하게 마련입니다.
우리가 이 거친 영적 겨울의 계절을 낙심하지 않고 끝까지 버텨내어 최종 승리자가 될 수 있는 유일한 마스터키는, 오직 내 안의 종교적인 의지력이 아니라 내 안에 성령으로 살아 계시는 주님과 매 순간 나누는 은밀하고 친밀한 사귐의 용량에 달려 있습니다. 본문의 저자인 사도 요한이 이 서신을 기록하여 온 천하에 전한 근본적인 목적 역시, 단순히 교리를 가르치기 위함이 아니라 이 글을 읽는 모든 성도가 나처럼 하나님과 깊은 사귐의 기쁨을 누리게 하려는 사랑의 발로였습니다. 요한은 성경의 수많은 인물 중에서도 예수님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정서적인 호흡을 맞추었던, 그야말로 주님이 특별히 사랑하셨던 자라는 독보적인 애칭을 소유한 인물이었습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고독하고 무거웠던 십자가 처형 전날 밤, 최후의 만찬이 벌어지던 그 긴박한 현장 속에서 사도 요한이 취했던 모습을 가만히 상상해 보십시오. 다른 제자들은 누가 더 크냐며 이기적인 논쟁을 벌이고 있을 때, 요한은 오직 나를 향한 예수님의 심장 소리를 들으며 좋으신 주님의 품에 조용히 영혼의 무릎을 베고 깊이 의지하여 누워 있었습니다. 사방에서 배신의 음모가 도사리던 암흑의 밤이었지만, 주님의 품 한가운데서 친밀함의 안식을 누렸던 요한의 모습은 진정한 사귐이 무엇인지를 온몸으로 증명해 줍니다.
심지어 예수님이 모든 제자가 무서워 도망쳐 버린 처절한 골고다 십자가의 형틀 위에 홀로 매달려 피 흘리시던 그 비참한 순간에도, 요한만큼은 주님의 십자가 밑바닥 자리를 끝까지 눈물로 사수하며 자리를 지켰습니다. 주님은 내 마지막 숨이 끊어지는 그 처참한 순간에 오직 요한을 바라보시며 "보라, 네 어머니라" 말씀하시고, 당신의 소중한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요한의 가정 위에 전적으로 위탁하셨습니다. 이처럼 요한은 인생의 가장 화려한 순간부터 가장 참혹한 바닥의 자리에 이르기까지 예수님과 단 1mm의 틈새도 없는 완벽한 사귐과 동행을 누렸던 예배자였습니다. 우리 역시 세상의 거친 풍파 앞에 내 요새를 세우려 버둥거리기 전에, 요한처럼 주님의 품에 내 영혼의 무릎을 베고 눕는 친밀한 사귐을 회복할 때 현실의 모든 두려움은 산산조각 깨어지고 하나님의 완전한 이끄심이 시작될 줄 믿습니다.

 

2. 사귐은 내 이성을 깨부수고 다가오는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가까이할 때 다가옵니다

우리가 사도 요한처럼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가장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인격적 사귐의 방으로 들어갈 수 있는 첫 번째 절대 법칙은, 내 얄팍한 상식과 환경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온 우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을 내 심장 가장 가까운 곳에 품는 일입니다. 말씀을 가까이한다는 진짜 의미는 단순히 활자를 눈으로 읽어 내려가는 지식의 행위를 뜻하지 않습니다. 선포되는 말씀을 내 영혼의 귀로 정직하게 경청하고, 그 말씀 뒤에 숨겨진 전능자의 약속을 100% 신뢰하는 정금 같은 믿음을 장착하여 주님 보좌 앞에 당당하게 걸어 나가는 거룩한 태도를 말합니다. 우리가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다가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하고 불치병 같은 난제를 만나게 되면, 우리는 본능적으로 주변 사람들을 향해 "지체하지 말고 기도의 골방으로 들어가 기도합시다!"라고 큰소리로 외치곤 합니다. 물론 그것은 지극히 옳고 아름다운 믿음의 고백입니다. 고난의 때에 기도의 무릎을 꿇지 않는 것은 영혼의 심각한 마비 증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 가지 명확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영적인 실상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한 채 내 고집과 이기적인 소원 성취만을 목적으로 무작정 때를 쓰며 부르짖는 기도는 결코 상달되는 참된 기도가 될 수 없다는 점입니다. 만약 우리의 인생 난제들이 무조건 소리 내어 울부짖는 맹목적인 기도로만 다 해결되는 단순한 메커니즘이었다면, 하나님께서 굳이 수천 년의 역사 동안 이 두꺼운 성경 책의 진리를 보석처럼 깎아 우리 손에 쥐어주실 이유가 전혀 없었을 것입니다. 기도의 자리에 나아가기 전에 가장 먼저 선행되어야 할 본질은, 이 성경 말씀 속에 정교하게 설계되어 있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진짜 속마음과 거대한 계획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아는 일입니다. 이 진리의 베일을 명확하게 알 때 비로소 우리의 기도는 흔들리지 않는 바른 궤도를 찾아 승리하게 됩니다.
사도 요한은 오늘 서신의 첫머리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을 향해 전율이 돋을 정도로 놀라운 영적 도약의 소식을 들려줍니다. 모든 성도는 단순히 종교를 믿는 관념의 차원을 완전히 뛰어넘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매일 실제적인 사귐을 나눌 수 있다는 선포입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요한일서 1:1)


여기서 요한이 목숨 걸고 증언하는 '생명의 말씀'이란 활자가 아니라, 말씀 그 자체가 육신이 되어 이 땅에 걸어 들어오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요한은 주님의 음성을 직접 귀로 들었고, 그분의 영광을 눈으로 목도했으며, 십자가의 못 자국 난 주님의 부활의 몸을 손으로 만져 마주했던 실제적인 증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요한이 이 과거의 역사적 사실을 지금 우리에게 다시 강력하게 꺼내어 드는 진짜 숨겨진 목적은, 이제 육신으로 주님을 만질 수 없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역시, 자기가 과거에 누렸던 그 생생하고 구체적인 주님과의 뜨거운 사귐을 오늘 내 방 한가운데서 똑같이 100%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확증하기 위함입니다.
요한은 이어서 3절 말씀에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라고 선포합니다. 여기서 요한이 고백한 "우리가 보고 들은 바"라는 표현의 시제는 원어로 놀랍게도 '현재 완료형'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문법적 시제가 우리에게 주는 영적인 울림은 실로 거대합니다. 요한은 지금 수십 년 전 청년 시절에 예수님과 함께 다녔던 과거의 추억을 회상하며 글을 쓰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셔서 육신으로는 내 눈앞에 보이지 않는 지금 이 순간에도, 성령 안에서 선포된 말씀을 매개체로 삼아 매일 아침 살아 계신 주님을 실시간으로 끊임없이 보고 들으며 사귐을 이어가고 있다는 현재 진행형의 고백인 것입니다.
우리는 비록 육체의 눈으로 보좌에 앉으신 주님을 대면할 수 없지만, 주님이 우리 손에 쥐어주신 이 성경의 말씀을 듣고 심장 깊이 믿음으로 수용하는 그 즉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내 영혼을 장악하여 나와 함께 교제하고 계시는 임재의 실체를 온몸의 전율로 깨닫게 됩니다. 성경 말씀은 단순히 종교 서적이 아니라, 말씀 그 자체가 곧 살아 숨 쉬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 책을 펼쳐 들고 읽을 때, 그리고 내 자아를 쳐서 복종시키는 말씀 선포를 들을 때, 그 시간은 지식을 채우는 지루한 시간이 아니라 말씀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 소리를 내 손으로 직접 만지고 사귀는 우주에서 가장 거룩한 시간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참된 사귐은 내 위선과 어둠을 걷어내고, 빛 가운데로 걸어 나갈 때 완성됩니다

우리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더 깊고 온전한 친밀함의 안식으로 들어가기 위한 두 번째 절대 법칙은, 내 자아의 껍데기를 깨부수고 온전한 '빛 가운데 행하는 삶'을 단행하는 일입니다. 생명의 말씀을 듣고 구원받은 성도들이 하나님과의 사귐을 방해받지 않고 날마다 누릴 수 있는 핵심 비결이 바로 이 빛의 자리에 머무는 태도에 숨겨져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사귐의 지속성을 위해 우리가 딛고 서야 할 제단의 자리를 명확하게 선포합니다.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한일서 1:7)


여기서 우리가 영적으로 깊이 고민해 보아야 할 본질적인 질문이 있습니다. 도대체 '빛 가운데 행한다는 진짜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 말을 세상의 도덕주의자들처럼 단 한 번의 실수나 허물도 없이 완전히 무결점하게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가는 완벽한 상태'라고 단정 지을 수 있을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빛 가운데 행하는 것이 죄를 단 1%도 짓지 않는 성인군자의 삶을 뜻하는 것이라면, 요한이 굳이 뒷문장에 "빛 가운데 행하면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씻어주실 것"이라는 보혈의 용서를 약속할 필요가 전혀 없었을 것입니다. 죄를 아예 짓지 않은 깨끗한 사람에게는 죄 씻음의 은혜가 필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선포하는 어둠과 빛의 진짜 영적 차이는, 내가 죄를 지었느냐 안 지었느냐의 행동 유무가 아닙니다. 내 안에 존재하는 허물과 죄를 '가식과 포장지로 숨기고 사느냐(어둠)', 아니면 '하나님 보좌 앞에 정직하게 오픈하고 고백하며 사느냐(빛)'의 진정성 차이입니다. 사도 요한은 스스로 죄가 없다고 큰소리치며 위선을 떠는 자들을 향해 도리어 영적인 어둠에 갇혀 제자리를 속이는 자라고 매섭게 책망했습니다. 반대로 진짜 빛 가운데 행하는 참된 예배자는, 내 연약함으로 인하여 죄를 지을 때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숨지 않고 솔직하게 자백하는 사람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한일서 1:9)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햇빛을 온몸으로 쬐기 위해서는 어두컴컴한 동굴 밖으로 걸어 나가야 하듯, 참빛으로 오신 주님과 친밀하게 사귀기 위해서는 내 부끄러운 민낯 그대로 빛 되신 주님 앞에 솔직하게 나아가면 됩니다. 찬란한 빛 앞에 서면 내 영혼의 은밀한 어둠과 흉측한 상처들은 섬뜩할 정도로 낱낱이 다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문제는 내 안에 꼬여있는 죄와 허물들이 거룩하신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철저하게 가로막아 영적인 소통을 파쇄하는 거대한 장애물이 된다는 점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기도가 막힌 비극의 원인을 날카롭게 지적했습니다.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이사야 59:2)


이 말씀처럼 하나님과의 온전한 소통을 가로막는 무서운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예수님이 이 땅에 찾아오사 십자가 대속의 보혈을 흘려주셨고, 우리는 그 공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입었습니다. 그러나 연약한 육신을 입고 살아가는 우리는 예수를 믿은 후에도 매일 거친 세상 속에서 타협하고 쓰러지며 수많은 죄의 얼룩을 묻히며 살아갑니다. 이 사소해 보이는 하루하루의 죄악들이 회개 없이 방치될 때, 그것들이 단단한 영혼의 벽이 되어 하나님과의 사귐을 완전히 단절시켜 버립니다. 아무리 밤을 새워 기도할지라도 내 죄를 감춘 채 드리는 위선의 기도는 단 1mm도 하늘 보좌에 상달되지 못하는 허공의 독백이 될 뿐입니다.

 

사실 저의 실제 삶의 고독한 세월 속에서도, 도무지 내 힘으로 제어할 수 없는 순간적인 죄의 유혹과 치열한 영적 전쟁을 벌이며 피눈물을 흘렸던 계절이 있었습니다. 밀려드는 세속의 소음을 떨쳐내지 못하고 어둠 속에서 죄와 타협하고 동행하면서, 제 안에는 지독한 죄책감과 정죄감의 상흔들이 유령처럼 나타나 영혼과 육신을 속수무책으로 무너뜨리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문이 완전히 닫힌 것만 같아 절망하던 어느 날, 저는 내 부끄럽고 추악한 모습 그대로 주님 발치 앞에 엎드려 가슴을 쥐어짜며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빛의 지성소 앞에 서자, 제 깊은 내면 속에 은밀하게 감추어 두었던 온갖 열등감과 허물의 상처들이 제 입술을 통해 낱낱이 자백되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내 포장지를 다 벗겨내고 정직하게 내 자아를 오픈했을 때, 놀랍게도 그 쓸쓸한 골방 한가운데에 창조주의 압도적인 임재의 파도가 밀고 들어왔고, 모든 죄악을 눈 녹듯 씻어내시는 죄 사함의 은혜가 강물처럼 제 심령 속에 사정없이 휘몰아쳤습니다. 죄는 내 힘으로 감추려 버둥거릴 때 영혼을 썩게 만들지만, 오직 빛 되신 주님 앞에 숨김없이 고백 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완전한 용서와 영원한 자유함의 기적을 체험하게 만드는 은혜의 통로가 됨을 제 평생의 삶으로 완벽하게 깨닫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위대한 참된 회개의 진정성을 누가복음 18장에 기록된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를 통해 우리에게 명확하게 대조하여 보여주셨습니다. 스스로 흠이 없다고 자부했던 바리새인은 성전 맨 앞자리에 꼿꼿이 서서 "나는 다른 세상의 토색하고 불의한 자들과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음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고 소득의 십일조를 온전히 드리나이다"라고 내 화려한 종교적 스펙과 의로움을 자랑하기 바빴습니다. 그러나 세상으로부터 매국노라 손가락질당하며 온갖 죄의 얼룩을 뒤집어쓰고 살았던 세리는,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한 채 그저 성전 차가운 바닥 구석에 엎드려 가슴을 쳐대며 짧은 신음을 토해냈습니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누가복음 18:13)


이 두 사람의 예배자 중에 과연 누가 진짜 거룩하신 하나님의 의롭다 하심을 얻고 눈물로 구원의 문을 나섰을까요? 세상의 도덕적 기준과 율법의 잣대로 평가한다면 십일조를 잘 내고 금식했던 바리새인이 무조건 100점짜리 의인이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평가는 세상의 눈을 보기 좋게 깨부숩니다. 주님은 바리새인이 아니라, 내 추악한 죄악을 정직하게 빛 앞에 자백했던 세리가 도리어 저 바리새인보다 훨씬 더 의로운 자라 인정받고 집으로 내려갔다고 선포하셨습니다. 바리새인은 내 허물을 감춘 채 어둠 속에서 가식과 형식이라는 율법주의 껍데기에 갇혀 살았지만, 세리는 내 나약함을 솔직하게 인정하며 빛 가운데로 걸어 나와 전능자의 자비를 구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일상생활을 하면서 "어차피 내일 또 먼지가 묻고 더러워질 텐데 세수와 샤워를 왜 매일 고단하게 반복해야 하는가?"라고 묻는 어리석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샤워를 마친 후 온몸을 감싸는 그 보송보송하고 상쾌한 기쁨이, 바로 매일 빛 가운데 행하며 회개하는 자들이 누리는 영혼의 청량한 자유함입니다. 만약 내가 어차피 또 죄를 지을 것이라는 핑계를 대며 순간순간 내 허물을 자백하지 않고 일주일, 한 달을 그대로 방치해 둔다면 우리의 영혼은 어떻게 될까요?
사방의 쓰레기를 뒤집어쓰고 살면서도 내 몸에서 나는 지독한 악취를 전혀 느끼지 못하는 노숙자처럼, 우리의 내면은 영적인 감각이 완전히 마비되어 버린 비참한 '영적 노숙자' 상태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말로만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교리적인 고백을 읊조리는 가짜 회개가 아닙니다. 진정한 고백에는 반드시 내 자아를 꺾고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겸손과 정직의 열매'가 자석처럼 따라오게 마련입니다. 침례 요한은 겉으로만 세례의 자격증을 따서 자랑하려 밀려들던 독사 같은 바리새인들을 향해, 이미 심판의 도끼가 나무뿌리에 웅장하게 놓여있으니 지체하지 말고 회개에 합당한 진짜 열매를 맺으라고 거칠게 호통쳤습니다.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마태복음 3:8-10)


진정한 회개의 가장 선명한 영적 열매는, 내 눈의 들보를 먼저 보았기에 감히 다른 이웃의 티끌을 함부로 정죄하거나 비판하지 않는 온유한 겸손함입니다. 남을 정죄하고 손가락질하는 태도야말로, 내 안의 죄악을 어둠 속에 꽁꽁 숨겨둔 채 "나는 죄가 없다"고 외치는 가장 추악한 바리새인적인 교만의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탕자의 비유에 등장하는 큰아들은 집 나간 동생을 품어 안는 아버지의 은혜의 잔치 앞에서 대단히 분노하며 동행하기를 거부했습니다. "나는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긴 적이 없거늘 왜 나에게는 염소 새끼 한 마리 주지 않았습니까!"라고 소리치며 내 의로움을 무기 삼아 동생을 잔인하게 정죄했던 큰아들의 태도야말로, 회개 없이 형식적인 관계에 갇혀 살던 어둠의 실상이었습니다. 그는 몸은 아버지의 집 안에 있었지만, 정작 아버지의 심장과는 단 1mm도 소통하지 못하는 가장 먼 거리에 버려진 고독한 이방인이었던 것입니다.

맺는 말

결론적으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나누는 진짜 영광스러운 사귐의 축복은, 내 감정과 처지의 기복에 따라 이리저리 표류하는 미숙한 종교 행위가 절대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가 매일 지겹도록 땀 흘려야 하는 척박한 광야 같은 일터 한복판에서, 내 이성의 계산기를 십자가 앞에 완전히 파쇄해 버리고 오직 현재 완료형의 산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생명의 말씀의 줄을 붙잡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또한 내 위선과 포장지를 다 걷어내고 내 연약한 민낯 그대로 빛 되신 주님 보좌 앞에 나아가 매일 영혼의 세수를 단행하는 정직한 자백의 삶을 살기를 간절히 고대하고 계십니다.
새로운 한 주간을 살아내며 여전히 내 숨은 허물과 현실의 무거운 죄책감 사슬에 묶여 영혼의 호흡이 가빠지셨습니까? 자기가 지은 죄를 없는 척 포장하며 어둠 속에 숨어 지내던 비참한 바리새인의 가식을 십자가 앞에 과감하게 내던져 버리십시오. 오늘 밤, "주님, 내가 단지 교리를 머리로 아는 나약한 차원을 뛰어넘어, 내 상처와 연약함을 빛 되신 주님 앞에 낱낱이 다 오픈하고 자백하는 참된 사귐의 방으로 걸어 들어가게 하옵소서"라고 겸손히 엎드리십시오. 우리가 내 숨은 어둠을 주님의 보혈의 빛 앞에 정직하게 내어드릴 때, 우리를 정죄하던 죄책감의 쇠사슬은 산산조각 깨어질 것이며, 세상이 줄 수 없는 아빠 하나님의 무한한 용서와 평안, 그리고 대역전의 최종 합격 승리가 삶의 모든 지경마다 영원히 마르지 않는 강물처럼 샘솟기 시작할 것입니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성경 책을 그저 차가운 지식의 책으로만 대하며, 내 부끄러운 죄악과 허물의 상처들을 어둠 속에 꽁꽁 감추어 둔 채 겉으로만 거룩한 척 위선을 떨었던 저의 추악한 바리새인적인 종교 생활의 민낯을 십자가 앞에 정직하게 자복하며 내려놓습니다. 광야 같이 어두워져 가는 세상 소음 속에서 내 힘으로 죄를 숨기려 버둥거리다가 영혼과 육신이 무너졌던 어리석음을 용서하여 주시고,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오직 주님의 심장 소리를 들으며 품에 누웠던 사도 요한처럼 내 마음의 모든 빗장을 열고 참된 사귐의 방으로 걸어 들어가게 하옵소서.
귀로만 전해 듣던 과거의 주님이 아니라, 오늘 내가 펼쳐 읽는 말씀 속에서 실시간으로 나를 만나주시는 현재 완료형의 말씀의 능력을 심장 가득 채우게 하소서. 내 모든 연약함을 다 아시면서도 회개할 기회를 주시기 위해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부르시는 아빠 하나님의 사랑 어린 음성 앞에 책임을 전가하지 않게 하시고, 오직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가슴을 치며 자백했던 세리의 정직함을 내 영혼의 옷으로 삼게 하옵소서. 매일 더러워지는 몸을 씻기 위해 세수와 샤워를 하듯, 순간순간 성령님이 주시는 마음의 찔림을 마주할 때마다 주님의 보혈의 빛 앞으로 달려 나가 내 죄를 자백하게 하사, 영적인 무감각한 노숙자로 전락하지 않도록 나를 날마다 성결하게 보존하여 주옵소서.
내 의로움을 무기 삼아 이웃과 가족들을 함부로 비판하고 정죄했던 교만을 파쇄하여 주시고,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겸손한 회개의 진짜 아름다운 열매를 맺어가게 하소서. 내가 서 있는 일터와 가정 속에서 날마다 말씀으로 오신 주님과 단 단 1mm의 숨김도 없이 투명하게 사귀고 동행하는 가장 가치 있고 품격 있는 명품 인생이 되게 하소서. 지금 이 순간에도 내 부서진 심령 한가운데 찾아와 보혈의 용서로 내 삶을 완벽하게 씻어주시는 좋으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본 글은 개인적인 신앙 경험과 성경 말씀 묵상을 바탕으로 작성된 칼럼입니다. 교단이나 특정 단체에 대한 판단은 공신력 있는 교단 기관의 입장을 함께 참고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