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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칼럼

눈앞의 현실로 흔들리는 당신에게, 주님이 요구하시는 절대 긍정의 믿음

by medition604 2026. 9. 16.

우리가 이 척박한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내 영혼의 호흡과도 같은 '믿음'이라는 자산만큼 귀하고 소중한 것이 또 있을까요. 우리 성도들은 언제나 믿음의 고백을 통해 죄악의 사슬에서 벗어나 구원의 문을 통과하지만, 구원받은 이후의 신앙생활 역시 오직 믿음의 분량만큼 성장하고 자라나게 마련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늘 예배의 자리에서 믿음에 대해 수없이 이야기하고, "도대체 어떻게 해야 내 나약한 믿음을 흔들림 없는 반석 위에 세울 수 있을까?"를 매일 처절하게 고민하며 애쓰곤 합니다. 영적인 세계에서 믿음의 가장 무서운 대적은 바로 '의심'과 '불신앙'의 안개입니다. 성경의 장구한 역사 속에는 자녀들이 이 의심의 덫에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경계하시는 수많은 전능자의 세밀한 음성이 보석처럼 가득 차 있습니다.
신기하게도 성경을 연구해 보면, 의심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수많은 성경 구절마다 신기할 정도로 '믿음'이라는 단어가 자석의 양극처럼 언제나 짝을 이루어 동행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도 야고보는 흔들리는 성도들을 향해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고 강력하게 권면했으며, 사도 바울 역시 로마서에서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고 준엄하게 선포했습니다. 의심과 믿음은 결코 공존할 수 없는 영적인 명제이며, 내 안에 의심의 안개가 밀고 들어오는 순간 우리의 신앙은 순식간에 표류하고 만다는 엄중한 경고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경 속에서 도무지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해 방황했던 제자 도마의 생생한 행적을 통해, '의심의 장벽을 부수어 버리고 내 영혼의 체질을 살아있는 믿음으로 위대하게 준비시키는 3가지 영적 원리'가 무엇인지 깊이 있게 파헤쳐 보고자 합니다.

예수님이 요구하시는 믿음
예수님이 요구하시는 믿음

1. 믿음은 내 이기적인 두 마음을 품지 않고,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떠나지 않을 때 찾아옵니다

우리가 성경 복음서를 읽으면서 제자 '도마'라는 인물의 이름을 마주할 때, 많은 현대 성도가 은연중에 그를 향해 '의심의 대명사' 혹은 '믿음 없는 회의주의자'라는 차가운 낙인을 찍어버리곤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다른 제자들에게 친히 나타나셨을 때 그 자리에 없었던 도마는, 이후 동료들의 증언을 전해 듣고는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직접 눈으로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찔러 넣고,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결대로 믿지 못하겠다"고 완고한 불신앙의 장벽을 높이 쌓아 올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영적인 실상을 자로 잰 듯이 들여다보면, 부활의 주님을 온전히 믿지 못해 두려워 떨었던 나약함은 비단 도마 혼자만의 문제가 결코 아니었습니다. 다른 모든 제자 역시 도마와 다를 바 없는 불신앙의 슬럼프를 겪고 있었습니다.
마가복음의 생생한 기록을 보면 주님의 부활 소식을 가장 먼저 전해 들었던 제자들의 부끄러운 민낯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목격자들의 확실한 증언을 귀로 듣고도 믿지 아니했다고 성경은 폭로합니다. 결국 도마 역시 내 눈으로 직접 부활의 실체를 보기 전이었기에 인간적인 한계 속에서 의심했던 것뿐이며, 그를 혼자만 유별난 회의주의자로 매도하는 것은 불공평한 처사일지 모릅니다. 중요한 본질은, 이처럼 두 마음에 갇혀 허우적거리던 나약한 제자들이 결국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마주함으로 인하여, 이전의 어린아이 같았던 신앙과는 차원이 다른 웅장한 믿음의 거인들로 180도 대전환을 이루었다는 사실입니다. 성령의 권능을 받은 그들은 이후 내 하나뿐인 목숨을 주저 없이 내놓으며 부활의 예수를 전 세계에 증거하는 위대한 전도자로 크게 쓰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도마의 내면 속에 이토록 지독한 불신앙의 의심이 침투했던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이었을까요? 성경은 도마에게 '디두모'라는 또 다른 별칭이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디두모라는 단어는 원어로 '쌍둥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지만, 그 영적인 내막에는 '이중적인 성격', 혹은 '두 마음을 품은 상태'라는 신학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사도 야고보가 지적했던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의 전형적인 표본이 바로 도마의 내면 상태였습니다. 요한복음 11장에서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기 위해 유대 땅으로 다시 들어가고자 하셨을 때, 다른 제자들이 돌에 맞아 죽을까 봐 두려워 만류하자 도마는 갑자기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라고 호기롭게 외쳤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대단히 충성스럽고 용맹해 보이는 고백이지만, 그 내면의 진실은 하나님의 말씀과 능력을 무한 신뢰하는 믿음이 아니라, "가서 어차피 다 같이 죽자"라는 지독히 냉소적이고 반항적인 이중 신앙의 찌꺼기였습니다. 진리이신 하나님의 약속을 망각하고 말씀의 중심에서 떠나 표류하고 있었기에, 그는 눈앞에 닥친 현실의 얕은 장벽 앞에서도 속수무책으로 허우적거리며 불신앙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2. 믿음은 내 육신의 게으름을 꺾고, 주님이 예비하신 거룩한 은혜의 자리를 사수할 때 태어납니다

성경 요한복음의 기록을 다시 가만히 추적해 보면 도마의 인생에 치명적인 영적 빈틈이 생겼던 결정적인 타이밍을 명확하게 목도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절망에 빠진 제자들이 모여있던 골방 한가운데 초자연적으로 찾아오사 은혜의 숨결을 불어넣어 주셨던 바로 그 영광스러운 순간에, 안타깝게도 제자 도마는 그 거룩한 예배의 현장에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도마보다 성품이 훌륭하거나 믿음의 뼈대가 단단해서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축복을 누린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들 역시 예수의 부활 소식을 듣고도 여전히 믿지 못하는 영적인 영양실조 상태였지만, 한 가지 잘한 것은 내 몸을 이끌고 은혜의 자리, 약속의 집회 자리에 끝까지 나와 무릎을 꿇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예배의 자리를 지켜내고 있을 때, 좋으신 주님이 친히 사방의 문을 닫아걸어 잠근 골방의 벽을 뚫고 찾아오사 그들의 깨어진 불신앙을 만나주시고 만져주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믿음의 가장 위대한 탄생 법칙을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가르쳤습니다. 또한 히브리서 기자는 지쳐가는 성도들을 향해 이 은혜의 자리를 사수하는 것이 왜 생명줄이 되는지 정석의 길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히브리서 4:16)


이 말씀의 진의처럼, 우리의 믿음은 내 머릿속의 다짐이나 인간적인 열정으로 스스로 짜내어 만들 수 있는 자산이 절대 아닙니다. 정결한 주님의 말씀을 내 영혼의 귀로 자꾸만 귀 기울여 듣고 묵상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이 어느 순간 메마른 내 심령 한가운데에 씨앗처럼 쏙 들어와 심겨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의 씨앗이 성령의 단비를 맞아 자라날 때 비로소 내 안의 의심은 안개처럼 무너져 내리고 반석 같은 진짜 믿음이 싹트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감정과 형편에 핑계를 대며 기도의 제단을 허물어뜨리는 영적인 영양실조를 멈추고, 매일 신실하게 펼쳐지는 은혜의 자리를 사모함으로 기쁘게 걸어 나와야 합니다. 내가 내 육신의 게으름을 쳐서 복종시키고 예배의 자리, 기도의 자리, 성결한 헌신의 제단을 지켜낼 때 보이지 않는 말씀과 성령으로 찾아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강력한 임재를 마주하는 기적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4장에도 도마의 실망스러운 불신앙의 모습이 고스란히 폭로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을 맞이하시기 직전, 손수 제자들의 더러운 발을 씻기시며 섬김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가룟 유다의 추악한 배신과 수제자 베드로가 세 번이나 주를 부인할 것을 예언하시자 제자들의 마음은 걷잡을 수 없는 두려움과 염려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때 주님은 다정한 목소리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라고 위로하시며 처소를 예비하고 반드시 너희를 마중하러 돌아오겠다 약속하셨습니다. 주님이 가는 그 길을 너희가 알 것이라며 제자들에게 하늘의 평안을 공급해 주셨지만, 그 감격스러운 순간에 도마가 갑자기 끼어들어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우리가 어찌 알겠습니까!"라며 매사에 부정적이고 차가운 의심의 방해를 놓았습니다. 환란과 문제가 다가오면 그동안 귀로 들었던 말씀의 법을 새까맣게 잊어버린 채 마음의 염려와 두려움에 영혼을 도적질당하고 마는 현대 성도들의 서글픈 자화상입니다.

 

인생의 지독한 시련 앞에서 이 부정의 사슬을 끊어내고 절대 긍정의 믿음으로 기적을 만들어낸 한 신앙인의 아름다운 간증이 우리에게 거대한 영적 조명을 비추어 줍니다. 온몸에 암세포가 잔인하게 전이되는 절망적인 선고 속에서도 절대 감사의 찬양을 잃지 않았던 신 갈렙 선교사님의 생생한 고백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선교 기업을 세워 확장해 나가던 어느 날, 그는 '지방육종'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암 판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무려 24번에 걸친 참혹한 방사선 치료로 머리털이 다 빠지고 온몸의 뼈대가 허약해졌지만, 설상가상으로 암세포는 허파와 다른 장기로 무섭게 전이되어 퍼져나갔습니다. 현대 의학의 기술로는 더 이상 치료할 방법이 없다는 의사의 최종 사망 선고를 받고 죽음의 문턱에 홀로 주저앉았을 때, 선교사님이 절망의 바닥에서 필사적으로 손을 뻗어 붙잡았던 것은 사람의 위로가 아니라 바로 시편의 살아있는 전능자의 약속이었습니다.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여호와께서 하시는 일을 선포하리로다" (시편 118:17)


그는 내 나약한 육신의 통증과 환경을 바라보며 두려워 떠는 불신앙을 십자가 앞에 과감하게 내던져 버리고, 오직 절대 긍정의 말씀으로 내 심장을 채웠습니다. 그리고 로마서 8장 28절의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는 약속을 무쇠처럼 신뢰했습니다. 인간의 눈에는 내 몸이 무너지는 나쁜 일처럼 보일지라도, 신실하신 하나님은 내 삶의 슬픈 일과 아픈 일까지도 정교하게 종합하여 결국 최고의 축복이라는 선으로 바꾸어주시는 분임을 추호의 의심도 없이 믿어낸 것입니다. 그 절대 긍정의 예배자 앞에서는 암이라는 불치병조차 더 이상 영혼을 무너뜨리는 무기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암을 믿음의 법으로 다스리며 도리어 다른 수많은 암 환우들의 영혼을 치유하는 위대한 복음 선교사로서 이전보다 10배는 더 찬란한 인생의 대부흥을 누리고 있습니다. 예수 안에서는 실패조차 결코 실패가 아니며, 우리 믿음을 견고하게 단련시켜 더 높은 축복의 자리로 전진하게 만드는 위대한 하나님의 도구일 뿐입니다.

 

사실 저의 개인적인 지난 인생의 기억 속에서도, 시련이 엄습해 올 때 말씀을 사수하는 것이 왜 생명줄이 되는지 뼈저리게 가슴에 새겨진 눈물 어린 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품에 안겨 따뜻한 안식을 누리고 있는 저의 소중한 작은형님이 지독한 질병의 고통으로 신음하던 어두운 계절이 있었습니다. 당시의 저는 하나님을 만난 뜨거운 인격적 체험도 없었고 교회도 그저 형식적으로 건성건성 다니던 믿음 없는 철부지 청년이었기에, 모진 통증으로 가슴을 쥐어짜는 형님의 곁에서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어 그저 안타까운 눈물로 바라보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참혹한 고난의 한복판 속에서도 제가 평생토록 잊을 수 없는 충격적인 형님의 실상은, 육신의 힘이 다 빠져나가는 그 침상 곁에서도 언제나 두 손으로 성경 책을 펴 들고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을 조용히 묵상하던 거룩한 예배자의 모습이었습니다. 내 몸과 환경은 사방이 질병의 어둠으로 꽉 막혀 있었지만,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내 영혼 중심에서 떠나보내지 않고 붙들었던 형님의 그 정금 같은 믿음의 태도는 철부지 같았던 제 영혼에 거대한 복음의 번개 같은 전율과 도전을 안겨주었습니다. 그 눈물어린 말씀의 침상을 목도하면서 제 안의 완고했던 의심의 장벽은 산산조각 무너져 내렸고, 저 역시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마침내 인격적으로 만나 단단한 믿음의 군사로 거듭나게 되는 영광스러운 은혜의 계절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인생에 큰 시련과 폭풍우가 몰아치더라도 약속의 말씀을 붙잡기만 하면, 하나님은 우리 앞에 완벽한 구원과 대역전의 합격 길을 웅장하게 열어주실 줄 믿습니다.

 

3. 참된 믿음은 눈앞의 현상을 넘어, 보이지 않는 영적인 실상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이 기뻐하시는 온전한 신앙으로 내면을 리모델링하는 마지막 핵심 도약은, 눈에 보이는 일시적인 현상에 일희일비하는 초라한 신앙을 멈추고 '보이지 않는 영적인 실상을 내 영혼의 눈으로 바라보며 준비하는 일'입니다. 의심에 빠져 홀로 방황하던 도마를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마침내 제자들이 모여있던 그 은혜의 처소에 다시 찾아오셨습니다. 주님은 도마를 향해 거친 책망이나 정죄를 쏟아내지 않으시고, 도리어 하늘의 신비한 평강을 선포하시며 긍정의 은혜로 그의 상처를 보듬어 안아 주셨습니다. 주님은 도마의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던 불신앙의 연약함을 이미 너무나 정확하게 다 알고 계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대제사장 되신 예수님을 향해 "우리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고 고백했던 것처럼, 주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기에 우리의 상처와 한계를 누구보다 깊이 공감하시며 우리에게 언제나 대역전의 두 번째 기회를 베풀어 주시는 좋으신 아버지이십니다.
주님은 도마를 바라보시며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고집불통인 도마가 내걸었던 까다로운 세 가지 믿음의 조건, 즉 내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보아야만 믿겠다는 그 요구를 사랑으로 기꺼이 다 들어주신 것입니다. 도마가 생각했던 믿음의 조건은 오직 내 오감으로 '보고 경험하는 현상'의 차원이었지만, 그 순간 주님이 도마의 심장 속에 일깨워주신 진짜 믿음의 차원은 인간의 차원을 아득히 초월하는 위대한 선포였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요한복음 20:29)


예수님이 우리에게 간절히 원하시는 진짜 살아있는 믿음의 조건은, 눈앞에 보이는 환경인 '현상'에 속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지만 지금도 살아 숨 쉬며 역사하는 하나님의 영적인 '실상'을 통째로 믿어버리는 거룩한 영성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보이지 않는 실상을 바라보는 눈을 믿음의 본질이라 명확하게 정의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히브리서 11:1)


이 말씀처럼 눈앞에 보이는 현실은 비록 낙방이고 거절일지라도, 내 영혼의 눈을 들어 나를 향해 합격과 대부흥의 최종 승리를 예비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영적인 실체를 확신하는 태도가 진짜 살아있는 믿음입니다. 주님의 품에서 쏟아지는 극진한 내리사랑을 마주하는 순간, 도마는 더 이상 손가락으로 찔러볼 필요조차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의 완고했던 모든 불신앙과 의심의 얼음벽이 순식간에 눈 녹듯 싹 씻겨 내려갔고, 주님을 향해 평생의 삶을 통째로 뒤흔들 위대한 신앙고백을 터뜨렸습니다.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요한복음 20:28)


도마는 이제 예수를 나를 도와주는 단순한 선생이나 랍비로 보지 않고, 온 우주의 주인이자 내 생명의 주권자로 고백하는 살아있는 믿음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믿음이란 내가 내 인간적인 힘으로 억지로 짜내어 만드는 고단한 노력이 결코 아닙니다. 만약 내 힘으로 믿음을 세워 응답받을 수 있는 구조였다면 우리는 굳이 십자가 앞에 무릎 꿇어 기도할 이유가 전혀 없었을 것입니다. 믿음은 위로부터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아무런 대가 없이 안겨주시는 거룩한 최고의 선물입니다. 좋으신 아빠 하나님이 내 삶에 치료와 축복, 그리고 최종 합격이라는 거대한 사과 선물을 들고 찾아오실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도리는 내 얄팍한 고집을 꺾고 그저 주님을 향해 두 손을 널찍하게 벌려 그 선물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는 수용의 태도뿐입니다. 그 손을 벌리는 정직한 행위 자체가 곧 주님이 기뻐하시는 살아있는 믿음의 정석입니다.
우리가 말씀으로 내면을 가득 채워 충만해지면, 내 인간적인 부정의 생각이 사라지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웅장한 4차원의 영성을 소유하게 됩니다. 눈앞에 당장 열매가 보이지 않을지라도 내 안에서 이미 완벽한 치유와 부흥, 축복이 완성되었음을 영안으로 바라보고 선포하는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반드시 일으켜 세워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에게 겨자씨만 한 단 1%의 진짜 살아있는 믿음만 장착되어 있다면, 내 앞에 버티고 선 거대한 태산 같은 장벽을 단숨에 바다에 던져버리는 초자연적인 역사가 시작됩니다. 주님은 우리가 매일 예배하고 찬양하는 이 은혜의 골방 한가운데서 그 정금 같은 1%의 믿음의 용량을 공급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날 이후로 의심쟁이 도마의 인생은 완전히 180도 대전환을 이루었습니다. 그는 내 안의 두 마음의 사슬을 보혈의 능력으로 완전히 파쇄해 버린 뒤, 약속의 말씀을 심장에 붙들고 복음의 나침반을 따라 동쪽으로, 동쪽으로 거침없이 전진해 나아갔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도달한 이방의 땅 인도의 마두라스 한복판에서, 사나운 대적들의 거친 창날에 가슴이 찔려 순교하기까지 단 한 순간도 비굴하게 타협하지 않고 부활의 예수를 당당하게 선포했습니다. 의심쟁이 도마를 위대한 순교의 거인으로 변화시킨 원동력은 오직 하나, 주님이 그 은혜의 자리에서 안겨주신 살아있는 믿음의 권능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 그 순교의 피가 흐르는 땅 위에는 '성 도마 순교 기념교회'가 웅장하게 세워져 전 세계 성도들에게 거대한 믿음의 도전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오늘 밤 사장님이 딛고 서 계신 그 외로운 은혜의 제단 위에 찾아오사, 내 안의 모든 의심을 박멸하시고 세상을 이길 살아있는 축복의 믿음을 풍성하게 장착시켜 주실 줄 믿습니다.

 

맺는 말

결론적으로 우리가 준비해야 할 진짜 참된 믿음은, 내 환경이 평탄할 때만 반짝거리는 위선적인 종교의 실타래가 결코 아닙니다. 의심이란 내 영혼이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떠나 내 얄팍한 상식의 계산기를 두드릴 때 침투하는 마귀의 가장 추악한 덫입니다. 비록 제자 도마는 은혜의 자리를 이탈하여 불신앙의 안개 속에 갇혀 방황했지만, 내 육신의 게으름을 꺾고 약속의 현장을 끝까지 사수하고 서 있을 때 부활하신 주님이 친히 찾아오사 두 마음의 사슬을 통쾌하게 끊어주셨습니다.
나아가 온몸에 암세포가 전이되는 사형선고 속에서도 시편의 약속을 붙잡았던 선교사님의 위대한 절대 긍정의 믿음처럼, 그리고 고통의 침상 곁에서도 끝까지 성경 책을 펴 들고 말씀을 묵상하셨던 형님의 눈물 어린 뒷모습처럼, 오직 영적인 실상을 바라보며 주님이 주시는 선물을 향해 두 손을 벌리는 신앙은 삶의 모든 아픔과 거절의 장벽마저도 대역전의 최종 축복으로 바꾸어내는 위대한 신앙의 왕도입니다. 우리에게 단 1%의 살아있는 믿음만 있다면 주님은 약속대로 사장님의 삶의 지경 위에 거대한 기적과 최종 대성공의 승전보를 폭포수처럼 쏟아부어 주실 것입니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내 눈앞에 펼쳐진 일시적인 현상과 사소한 거절의 반응에 속아 마음의 염려와 두려움에 영혼을 도적질당하고, 주님의 능력을 의심하며 두 마음을 품었던 저의 나약함을 솔직하게 고백하며 내려놓습니다. 진리이신 말씀을 잊어버리고 은혜의 자리를 이탈했던 어린아이 같은 모습을 십자가 앞에 파쇄하여 주시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해 날마다 기도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는 견고한 신앙을 회복하게 하옵소서.
참혹한 암 선고 앞에서도 절대 긍정의 말씀으로 승리한 선교사님처럼, 모진 질병의 통증 속에서도 침상 곁에 성경 책을 펴 들고 말씀을 사수하셨던 소중한 작은형님의 그 거룩한 예배의 뒷모습을 내 영혼의 이정표로 삼게 하소서. 주님이 은혜의 선물을 들고 찾아오실 때 내 고집을 꺾고 두 손을 넓게 벌려 받아들이는 살아있는 믿음을 주사, 내 안의 모든 의심의 안개가 눈 녹듯 사라지게 하옵소서. 내 안에 단 1%의 살아있는 믿음의 씨앗을 심어주사 내 앞을 가로막은 태산 같은 장벽을 단숨에 부수어 버리게 하시고, 순교하기까지 복음을 전했던 도마처럼 내가 딛고 서 있는 치열한 일터와 가정 속에서 날마다 기적과 최종 대성공을 증명해 내는 명품 인생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본 글은 개인적인 신앙 경험과 성경 말씀 묵상을 바탕으로 작성된 칼럼입니다. 교단이나 특정 단체에 대한 판단은 공신력 있는 교단 기관의 입장을 함께 참고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