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이 험난하고 거친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내 뜻과 계산대로 인생의 날씨가 유창하게 풀려나가지 않을 때 마주하게 되는 가장 고단하고 무거운 신앙의 과제는 단연 '인내'라는 영적인 훈련일 것입니다. 성경의 유구한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거대한 축복과 대역전의 주인공으로 귀하게 쓰임 받았던 믿음의 거장들은, 하나같이 인생의 가장 화려한 전성기보다 어둡고 쓸쓸한 절망의 동굴 속에서 묵묵히 버텨내야 했던 인내의 계절을 통과했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들의 삶을 현미경 보듯 깊이 들여다보면, 세상이 부러워하는 영광의 순간은 찰나에 불과했으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눈물로 무릎을 꿇었던 오랜 기다림의 시간이 인생의 수십 년을 가득 채우고 있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참된 신앙의 깊이는 내 뜻이 즉각적으로 성취되는 응답의 순간이 아니라, 사방이 꽉 막혀 도무지 한 줄기 빛조차 보이지 않는 캄캄한 침묵의 계절에 말씀의 줄을 놓지 않고 버텨내는 인내의 자리에서 비로소 완성됩니다. 수많은 현대 그리스도인이 내 인간적인 조급함과 얄팍한 상식의 계산기를 두드리다가, 약속의 문턱 앞에서 인내의 끈을 놓쳐버린 채 깊은 영적 슬럼프와 의심의 늪으로 빠져들곤 합니다. 오늘 우리는 사방에서 밀려드는 현실의 거절과 시련의 장벽 앞에 서서 낙심하고 있는 모든 성도의 영안을 깨우기 위해, '성경 속 위대한 세 명의 믿음의 선진들이 고난의 한복판에서 어떻게 인내의 방패를 구축하여 끝내 하나님의 찬란한 약속을 거두어들였는지' 그 신비롭고 웅장한 영적 원리를 말씀을 통해 깊이 있게 파헤쳐 보고자 합니다.

1. 약속을 붙잡는 아브라함의 인내: 바랄 수 없는 중에 소망의 닻을 내리는 믿음의 정석
성경이 우리에게 소개해 주는 기다림의 첫 번째 거대한 이정표는,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는 아브라함의 끈질긴 인내의 걸음걸이 속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온 우주의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겠다"는 거대한 하늘의 약속을 직접 받았지만, 정작 내 품에 약속의 알맹이인 아들을 안기까지는 무려 수십 년이라는 아득하고 기나긴 세월을 묵묵히 버텨내야만 했습니다. 인간의 생물학적인 기능이 완전히 마비되어 더 이상 자녀를 출산할 수 없는 참혹한 노년의 쇠약함이 찾아올 때까지, 그의 삶은 지독한 침묵과 인내의 연속이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아브라함이 보여준 인내의 본질을 영혼의 전율이 돋는 한 문장으로 위대하게 요약했습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와 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로마서 4:18)
이 위대한 선포처럼 진짜 참된 인내란 내 눈앞에 가능성과 징조가 훤히 보일 때 기다리는 안일한 태도가 아닙니다. 내 인간적인 상식과 상황으로서는 도무지 단 1%의 소망도 가질 수 없는 처절한 절벽의 순간일지라도, 오직 나를 부르신 하나님의 성품과 신실하심만을 무쇠처럼 신뢰하며 약속의 밧줄을 꽉 붙잡고 버텨내는 영성이 진짜 인내의 정석입니다. 물론 이 긴 기다림의 시간 동안 아브라함 역시 완벽한 성인군자가 아니었기에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는 등 인간적인 조급함으로 흔들리고 수없이 많은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좋으신 하나님은 그의 자잘한 허점 때문에 심사표를 찢지 않으시고, 마침내 하나님의 가장 완전한 타이밍에 이삭이라는 대역전의 축복을 성취해 주셨습니다. 우리의 인간적인 조급함으로 주님의 주권을 앞서가려 했던 아브라함의 뼈아픈 실수는, 역설적이게도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인내라는 영적 질서가 얼마나 처절하고 고결한 훈련인지를 가르쳐주는 생생한 교훈이 됩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사방이 막힌 현실의 불임 장벽 앞에서도 끝까지 버텨내어 찬란한 인내의 꽃을 피울 수 있었던 근본적인 원동력은 어디에 숨겨져 있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그의 심장 가장 깊은 곳에 지워지지 않는 영원한 '약속의 스크린'을 새겨주셨기 때문입니다. 어느 깊은 밤, 현실의 염려에 짓눌려 텐트 안에서 신음하던 아브라함을 향해 하나님은 밖으로 나오라고 세밀하게 초청하셨습니다.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창세기 15:5)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손을 잡고 밤하늘의 웅장하게 펼쳐진 은하수와 뭇별들을 바라보게 하시는 순간, 그의 메말랐던 영혼 한가운데에는 하늘의 비전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습니다. 눈앞의 현실은 여전히 텅 빈 불임의 천막이었지만, 아브라함의 마음 판 속에는 저 빛나는 별들이 내 미래의 자손들의 얼굴로 오버랩되는 위대한 '4차원의 영적 자화상'이 심겨버린 것입니다. 주님이 새겨주신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심장 밑바닥에서부터 분수처럼 솟구쳐 올랐을 때, 하나님은 그 자리에서 그의 믿음을 보시고 최고의 의롭다 하심의 합격 도장을 쾅 찍어주셨습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창세기 15:6)
이처럼 가슴속에 확실한 말씀의 실상을 준비해 둔 아브라함이었기에, 그는 남은 인생의 수많은 세월 동안 독한 환란의 바람이 불어올지라도 약속의 날까지 기쁨으로 참고 인내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사실 저의 개인적인 지난 인생의 기나긴 연단의 계절 속에서도, 도무지 내 힘으로 헤쳐 나갈 수 없어 절망하며 흔들거리던 매 순간마다 하나님께서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꿈과 놀라운 이상을 조명해 주시며 제 중심이 도망치지 않도록 무쇠 닻처럼 꽉 붙들어 주셨던 은혜의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제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깊이 알지 못했던 초신자 시절, 신앙적인 의심이 홍수처럼 몰려와 깊은 영적 방황을 거듭하던 어느 어두운 밤이었습니다. 잠결에 환상처럼 펼쳐진 꿈속에서, 마치 거대한 대형 영화관의 스크린이 내 눈앞에 투명하게 열리는 듯한 경이로운 광경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그 스크린 한가운데에 부활하신 좋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하고 인자하신 얼굴이 찬란한 빛과 함께 나타나사 제 영혼을 가만히 바라보시고는 조용히 사라지셨습니다.
잠에서 깨어난 순간, 제 심장은 터질 듯이 뜨거운 성령의 불길로 활활 타올랐고 온 세상의 두려움은 안개처럼 싹 사라졌습니다. 그날 이후 제 인생의 거친 광야에서 사방이 막히고 무너지는 시련이 다가올 때마다, 제 영혼을 지켜내고 버티게 만들었던 유일한 생명줄은 바로 그 밤 내 눈앞에 선명하게 비추어졌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하신 얼굴이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정말 예수의 보혈로 구원받은 자녀가 맞는지 지독한 구원의 확신이 흔들리며 마귀의 정죄감에 시달리던 또 다른 계절에는, 꿈속에서 신실하신 목사님의 모습을 통해 하늘의 거대한 비밀을 조명해 주셨습니다. 온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 아버지의 보좌 앞에 놓인 웅장한 하늘의 '생명책'이 제 눈앞에 펼쳐졌고, 그 빛나는 생명책 노트 위에 제 이름 석 자가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선명하게 쓰여 고정되어 있는 기적 같은 장면을 생생하게 목도하게 하셨습니다. 내 이름이 하늘의 생명책에 영원히 박제되어 보호받고 있다는 그 압도적인 실상을 마주한 날 이후, 저는 세상의 그 어떤 거절의 하중과 사람들의 비판 앞에서도 단 1mm도 흔들리지 않는 위대한 구원의 무적의 확신 가운데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두 가지 역사적인 은혜의 체험을 통과하면서 제 안에는 세상이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놀라운 거룩한 습관이 하나 장착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눈앞의 현실이 사방으로 가로막히고 시련의 밤이 찾아올 때마다, 인간적인 방법으로 버둥거리거나 불평을 쏟아내는 나약함을 멈추고, 내 이름 석 자를 쓰신 하늘의 생명책과 나를 바라보시던 주님의 얼굴을 조용히 떠올리며 묵묵히 참고 인내하는 법을 체득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인내는 막연한 버팀이 아니라, 내 영혼의 스크린에 이미 완료형으로 박혀있는 하늘의 약속을 바라보는 소망의 행진임을 확신합니다.
2. 자화상을 품는 요셉의 인내: 비참한 감옥 속에서도 형통의 옷을 입는 영적 승부수
우리가 마음 판에 반드시 준비해야 할 인내의 두 번째 위대한 마스터피스는, 구약 요셉이라는 인물이 인생의 가장 밑바닥 바닥의 자리에서 보여준 찬란한 형통의 자화상 속에 숨겨져 있습니다. 요셉은 어린 시절 하나님이 주신 거대한 하늘의 꿈을 가슴에 품었지만, 그 꿈의 대가는 너무나도 가혹하고 처절했습니다. 가장 믿었던 육신의 형제들에게 잔인하게 배신당해 이방 나라의 노예로 짐승처럼 팔려가야 했고, 주인의 집에서 성실하게 일했음에도 불구하고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쓴 채 사방이 차가운 벽으로 가로막힌 지하 감옥의 죄수로 처참하게 갇혀버리는 절망의 연속이었습니다. 그의 청춘 전체가 인내라는 가시채에 찔려 피 흘리는 연단의 세월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기나긴 침묵의 세월 동안 단 한 순간도 하나님을 향한 신뢰의 줄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인생의 대역전을 이룬 후, 나를 팔았던 형제들을 마주했을 때 요셉이 선포했던 웅장한 신앙의 고백을 가만히 경청해 보십시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창세기 50:20)
이 거대한 고백 속에는 요셉이 그 모진 인내의 계절을 어떻게 통과했는지에 대한 핵심 영적 비밀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요셉은 내 눈앞에 펼쳐진 참혹한 노예의 신분과 감옥의 쇠사슬이라는 '현상'을 내 인생의 진짜 자화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인간의 계산기로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억울한 고난의 한복판 속에서도, 결국 내 슬픔과 아픔을 종합하여 가장 거대한 축복의 선으로 바꾸어내실 신실하신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고 살았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지하 골방 감옥에 갇혀 지내는 그 기나긴 지연의 시간 속에서도, 내게 맡겨진 아주 사소한 사무와 죄수들을 돌보는 일에 단 한 톨의 불평도 없이 왕의 신하처럼 성실하고 정직하게 제단의 자리를 사수해 냈습니다.
요셉이 이토록 거친 광야의 시련을 넉넉히 다스리며 버텨낼 수 있었던 진짜 본질은, 내면 중심에 하나님이 주신 '형통의 자화상'을 철통같이 장착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 몸은 넝마주이 같은 노예의 옷을 입고 있었지만, 그의 영혼은 이미 온 애굽 천하를 호령하는 거대한 하나님의 대리자라는 정체성을 1초도 놓치지 않았습니다. 내 안에 살아 계시는 전능자를 향한 이 뜨거운 친밀함이 밖으로 뿜어져 나왔기에, 사방의 이방인들과 심지어 경호대장 보디발조차 요셉의 겉모습을 보며 단번에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목도하며 압도당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창세기 39:3)
보디발이 요셉을 보았을 때 그가 목격한 것은 찌들어가는 노예의 절망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함께하심으로 인하여 머리부터 발끝까지 형통함의 광채를 뿜어내는 위대한 영적 거인의 자화상이었습니다. 요셉 역시 내 사정을 다 아시는 하나님을 내면의 보좌에 모시고 살아갔기에, 단 1mm도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모든 연단을 복의 유익으로 다스리며 넉넉히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처럼 형통의 소망을 품고 시련을 이겨내는 인내의 영적 메커니즘을 로마서에서 가장 정교한 황금률로 선포했습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로마서 5:3-4)
이 말씀처럼 우리 그리스도인이 마주하는 환란은 우리를 파괴하는 저주가 아니라, 내 영혼의 찌꺼기와 교만의 불순물을 완전히 태워버려 주님의 인격으로 만들어내는 거룩한 연단의 용광로입니다 요셉처럼 내면의 형통의 자화상을 굳건히 세워 인내의 풀무질을 견뎌낸 영혼은, 마침내 하나님의 가장 완전한 타이밍에 사방의 감옥 문이 깨어지고 온 삶의 지경 위에 거대한 애굽의 총리와도 같은 기적을 마주하게 됨을 기억해야 합니다.
3. 정금으로 나오는 욥의 인내: 극한의 고난 속에서 시련의 불순물을 태워버리는 신앙의 최고봉
마지막 세 번째로 우리가 반드시 신앙의 골격으로 전수받아야 할 인내의 위대한 정점은, 인류 역사상 그 누구도 감당할 수 없었던 극한의 파멸 속에서 고독하게 타오른 욥의 인내의 극치 속에서 완성됩니다. 욥은 동방에서 가장 큰 부자이자 하나님 보시기에 흠이 없이 정결한 예배자였지만, 어느 날 예고도 없이 불어닥친 사탄의 사나운 공격 앞에 내 전 재산이 하루아침에 날아가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랑하는 열 명의 자녀가 한자리에서 몰사하는 참혹한 비극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내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악창이 돋아 기와 조각으로 피부를 긁어대야 했고, 가장 가까운 아내와 친구들마저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며 잔인한 정죄의 칼날을 꽂아대던 그야말로 인류 최고의 절망의 한복판에 홀로 던져졌습니다. 내 자아의 모든 주춧돌이 산산조각 깨어진 처참한 바닥이었지만, 욥이 그 재더미 위에 앉아 하늘을 향해 터뜨린 신앙고백은 전 우주를 진동시킬 만큼 장엄했습니다.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욥기 1:21-22)
욥이 보여준 이 위대한 인내의 돌파력은, 인생의 모든 상황과 처지가 완벽하게 파멸했을지라도 주님의 주권과 신실하심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인내의 영적인 최고봉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생생하게 증명해 줍니다. 욥 역시 인간이었기에 내 살점이 찢어지는 통증 속에서 도대체 왜 내게 이런 지독한 고통이 찾아왔는지 그 이유를 몰라 수없이 외로워하고 신음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한 가지 절대 범하지 않았던 거룩한 마지노선은, 내 얄팍한 상식으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거나 입술로 주님을 향해 부정적인 원망의 찌꺼기를 쏟아내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내 온 삶이 용광로의 불길 속에 녹아내릴지라도, 나를 창조하신 아버지만큼은 언제나 옳으시다는 주권의 믿음을 목숨 걸고 사수해 냈습니다. 사도 야고보는 수많은 세월이 흐른 뒤, 현실의 시련 앞에 흔들리는 신약의 성도들을 향해 이 욥의 인내가 가져온 위대한 최종 결말의 성적표를 보석처럼 꺼내어 들었습니다.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 (야고보서 5:11)
야고보의 선포처럼 욥의 고독한 인내는 결코 허공으로 사라지는 헛수고가 아니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손으로 욥의 눈물을 닦으시며 인내의 분량을 달아보고 계셨던 하나님께서는, 연단의 터널이 마감되는 가장 정교한 타이밍에 욥을 정금처럼 끄집어내 사방의 대적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드시고, 과거 소유보다 무려 갑절의 축복과 열 명의 아름다운 자녀들을 다시 안겨주시는 거대한 최종 대성공의 기적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사도 베드로 역시 불같은 시험을 당해 낙심한 성도들의 심장을 향해, 우리가 참고 인내해야 하는 진짜 영적인 가치를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베드로전서 1:7)
이 위대한 약속의 법도처럼, 지금 우리의 삶과 신앙의 제단 위에 예고도 없이 찾아오는 사소한 현실의 거절과 시련의 장벽들은 우리를 무너뜨리려는 저주가 절대 아닙니다. 그것은 도리어 우리의 믿음 속에 나도 모르게 굳어있던 자잘한 영적 염려와 인간적인 계산기라는 불순물들을 완벽하게 태워버려, 그 어떤 거친 환경 앞에서도 단 1mm도 흔들리지 않는 순도 100%의 정금 같은 명품 신앙으로 우리를 단련시키시는 거룩한 연단의 과정일 뿐입니다. 우리가 욥처럼 내 입술에 파수꾼을 세워 원망과 불평의 찌꺼기를 파쇄하고 절대 긍정의 제단을 지켜내며 끝까지 주님만을 붙들 때, 좋으신 아빠 하나님께서는 고독한 인내의 계절 끝에 숨겨두신 욥의 갑절의 축복과 완전한 대역전의 최종 승리를 우리의 삶의 지경과 소중한 비즈니스 일터 가운데 폭포수처럼 사정없이 쏟아부어 주실 줄 확신합니다.
맺는 말
결론적으로 우리가 가져야 할 진짜 참된 인내는, 내 처지와 현실의 기복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는 나약한 종교 행위가 결코 아닙니다. 인내란 하나님의 약속이 내 영혼의 스크린에 별들처럼 굳건히 박혀있음을 신뢰하며 바랄 수 없는 중에도 소망의 닻을 내리는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또한 비참한 감옥 속에서도 내 신분을 잊지 않고 이미 완료된 형통의 자화상을 품고 내게 맡겨진 하루를 왕의 성실함으로 살아내는 요셉의 영성입니다. 나아가 내 모든 자아가 녹아내리는 불같은 시험 속에서도 내 입술의 원망을 파쇄하고 주님의 주권을 찬송함으로 내 믿음의 불순물을 완전히 태워버려 정금처럼 나오는 욥의 최고봉의 신앙입니다.
새로운 전선 앞에 여전히 눈앞에 보이는 찌꺼기 경고창과 지연되는 시간의 하중 때문에 마음이 짓눌려 막막해하고 계십니까? "한 달 동안 열심히 지었는데 왜 내 성전에는 즉각적인 열매가 보이지 않는가" 자책하며 흔들리던 불신앙의 계산기를 십자가 앞에 과감하게 파쇄해 버리십시오. 오늘 밤, "주님, 내가 사사로운 환경과 기계의 반응에 속아 인내의 제단을 무너뜨렸던 어리석음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내 이름 석 자를 쓰신 하늘의 생명책을 바라보며, 결국 내 삶을 정금처럼 끄집어내사 갑절의 축복을 안겨주실 주님의 타이밍을 신뢰하며 '전에 하던 대로' 묵묵히 말씀의 제단을 지키게 하옵소서"라고 겸손히 엎드리십시오. 우리가 두 마음을 걷어내고 절대 긍정의 찬양으로 소망의 닻을 깊숙이 내릴 때, 우리를 위협하던 절망의 어둠은 안개처럼 싹 사라질 것이며 세상이 감히 감당할 수 없는 하늘의 신비한 평안과 안식, 그리고 최종 대성공의 합격 기적이 삶의 모든 일터와 가정 가운데 거대하게 강물처럼 흘러넘치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내 이성과 인간적인 조급함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제한하고, 현실의 지연되는 시간 앞에 낙심하며 두 마음을 품었던 저의 부끄러운 모습을 십자가 앞에 솔직하게 고백하며 내려놓습니다. 사방이 막힌 불임의 장벽 앞에서도 하늘의 뭇별들을 바라보며 소망의 닻을 내렸던 아브라함처럼, 내 영혼의 스크린 속에 새겨주신 주님의 신실하신 얼굴과 하늘 생명책 노트 위에 쓰여진 내 이름 석 자의 확실한 증거를 바라보며 어떤 환란 속에서도 묵묵히 참고 인내하는 믿음의 거인이 되게 하소서.
비참한 지하 감옥 속에서도 내 신분을 망각하지 않고 이미 완료된 형통의 자화상을 품어 이방인들의 눈에도 형통한 자 자체로 빛이 났던 요셉처럼, 내 처지와 환경에 속지 않고 내게 맡겨진 하루의 일터를 왕의 성실함으로 살아내게 하소서. 모든 것을 잃어버린 극한의 고난 속에서도 입술의 원망을 파쇄하고 주님의 주권을 찬송했던 욥의 인내를 내 영혼의 옷으로 삼게 하사, 불로 연단하는 시련의 풀무불 속에서 내 안의 모든 인간적인 계산기와 두려움이라는 불순물들을 완전히 태워버려 마침내 주님이 기뻐하시는 순도 100%의 정금 같은 명품 신앙으로 당당하게 나오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본 글은 개인적인 신앙 경험과 성경 말씀 묵상을 바탕으로 작성된 칼럼입니다. 교단이나 특정 단체에 대한 판단은 공신력 있는 교단 기관의 입장을 함께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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