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은연중에 범하게 되는 가장 큰 오류 중 하나는,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짜놓은 얄팍한 경험과 고정관념이라는 조그만 상자 속에 가두어 두려 하는 태도입니다. 우리는 보통 웅장하고 거룩한 성전 안에서, 정형화된 예배의 순서 속에서, 혹은 내 삶이 아주 평탄하고 화려하게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을 때에만 주님이 내 삶에 찾아와 일하실 것이라고 맹목적으로 확신하곤 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장구한 역사와 복음의 진리가 증명하는 위대한 실상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단 한 번도 인간이 정해놓은 편협한 방식대로만 우리를 찾아오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주님은 우리의 예상을 보기 좋게 깨부수고, 도무지 하나님이 계시지 않을 것만 같은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과 장소에서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당신의 살아계심을 섬뜩할 정도로 선명하게 드러내어 보이시곤 합니다.
이처럼 내가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시공간의 틈새를 뚫고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마주하는 경험은, 미적지근했던 우리의 신앙 여정에서 평생토록 잊을 수 없는 거대한 영적 터닝포인트가 됩니다. 내 중심적인 종교성의 장벽이 무너져 내리고, 우주 만물보다 크신 하나님의 주권이 내 삶을 온전히 장악하는 거룩한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결코 우리가 만든 종교적 울타리 안에 갇혀 계시는 제한적인 분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는 지쳐가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무뎌진 영안을 깨우기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의 고정관념을 넘어 전혀 예상치 못한 낮은 자리와 뜻밖의 통로, 그리고 지극히 평범한 일상의 현장 속에서 어떻게 우리를 마주해 오시는지 그 신비롭고 웅장한 영적 원리를 살아있는 삶의 고백과 성경 말씀을 통해 깊이 있게 파헤쳐 보고자 합니다.

1. 인생의 가장 처절한 바닥, 가장 낮은 자리에서 마주하는 하나님의 선명한 숨결
인생의 무대 위에서 내가 가장 초라하고 보잘것없이 느껴졌던 실패의 시기, 사방이 벽으로 막혀 도무지 빠져나갈 구멍이 보이지 않던 절망의 자리에 홀로 주저앉아 있을 때, 역설적이게도 그 바닥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가장 뜨겁고 선명하게 만났다고 가슴 쥐어짜며 눈물로 고백하는 성도들이 참 많습니다. 세상의 성공과 화려함, 물질의 풍요함 속에서는 내 눈이 멀어 도무지 느껴지지 않았던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가, 내 모든 힘이 빠지고 인생의 밑바닥까지 추락한 그 지성소와 같은 자리에서 오히려 가장 또렷하고 거부할 수 없는 은혜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다윗은 모진 연단 속에서 이 영적인 진실을 뼈저리게 고백했습니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시편 34:18)
이 말씀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교만하게 어깨를 펴고 있을 때가 아니라, 인생의 가시채에 찔려 가슴이 찢어지고 상한 영혼으로 신음하고 있을 그 순간에 오히려 우리의 심장 가장 가까운 곳에 은혜의 텐트를 치시고 다가오십니다. 그러나 미련한 인간은 모진 고난과 척박한 환경을 당하게 되면, 눈앞의 거대한 파도와 연단에 완전히 압도당해 버리기 때문에 내 주변을 따뜻하게 감싸 안으시는 하나님의 세밀한 숨결을 그 즉시 깨닫지 못하고 원망과 불평을 쏟아내기 바쁩니다.
사실 저의 실제 과거 삶 속에서도, 도무지 끊어지지 않는 아픈 상처의 기억과 지독한 영적 침체로 인하여 극심한 신앙의 슬럼프를 속수무책으로 지나던 암흑의 계절이 있었습니다. 말씀의 책을 펼쳐 읽는 것조차 한없이 게을러졌고, 차가운 골방에 무릎을 꿇어보아도 입술이 얼어붙어 단 한 줄의 기도조차 터져 나오지 않는 영적인 영양실조 상태였습니다. 과거의 부끄러운 과오와 실패의 기억들이 내 발목을 단단히 붙잡아 영혼의 쇠사슬이 되었고, 지독한 열등감과 죄책감의 깊은 상흔들이 내 심장을 사정없이 짓눌러 영적으로 단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처절한 마비 상태를 겪었습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이 꼬인 인생을 풀어야 할지 몰라 절망하던 어느 날, 성경 말씀을 묵상하다가 위대한 이방인의 사도였던 바울 역시 나와 똑같은 인간적인 지독한 과거의 트라우마와 상흔에 시달리며 방황했음을 발견하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빌립보서 3:13-14)
여기서 사도 바울이 고백한 "뒤에 있는 것"이란 결코 아름다운 추억이 아닙니다. 그것은 지난날 영적인 무지함에 사로잡혀 스데반 집사를 돌로 쳐 죽이는 자리에 주동자로 섰고,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를 잔인하게 핍박하며 예수 믿는 무리를 잡아 가두었던 그의 지독하고 추악한 과거의 범죄 기억이자 죄책감의 상흔이었습니다. 그 끔찍한 상처의 트라우마가 바울의 위대한 사역 걸음걸이마다 유령처럼 나타나 그의 발목을 붙잡고 흔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좋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환상 중에 인격적으로 마주한 그 순간, 내 과거의 흉측한 죄악보다 주님의 십자가 용서의 은혜가 백배 천배 더 크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깨닫고 과거의 사슬을 통쾌하게 끊어내 버렸습니다. 내 지독한 상처보다 더 좋으시고 위대하신 예수의 사랑을 심장 깊이 알게 되었기에, 그는 더 이상 과거에 매여 방황하지 않고 푯대를 향해 거침없이 전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가 어떤 거대한 문제와 불치병 같은 절망에 직면하게 되면, 우리의 나약한 시선은 온통 그 문제의 크기에만 몰두하여 하나님을 잃어버리곤 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진실은, 내 삶에 그것보다 백배 천배 더 크고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대형 폭풍우가 몰아치게 되면, 과거의 자잘한 문제들은 더 이상 문제조차 되지 않는 영적 상쇄 현상이 일어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는 내 과거의 상처와 현실의 절망보다 비교할 수 없이 거대하고 위대하신 좋으신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의 인생 전체를 완벽하게 프로그래밍하여 인도하고 계십니다.
도움을 구할 곳이 단 한 군데도 없다고 절규하던 그 처절한 밑바닥 낮은 자리에서, 나를 대신해 피 흘리신 예수를 깊이 마주했던 그 전환점의 기억은 우리의 평생의 신앙을 떠받치는 단단한 주춧돌이 됩니다. 이 사실을 내가 고난의 한복판에서도 여전히 흔들림 없이 신뢰한다면, 과거의 아픈 상흔들과 현실의 낮은 자리는 결코 우리의 앞길을 막아서지 못하며 오히려 창조주의 거룩한 축복을 기대하게 만드는 최고의 영적 산실이 되는 것입니다.
2. 내가 정해놓은 거룩한 통로를 깨부수고,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뜻밖의 사람을 통해 다가오시는 하나님
우리가 예상치 못한 곳에서 하나님을 마주하게 되는 두 번째 놀라운 통로는, 때로는 전혀 신앙과 관련 없어 보이는 세상의 낯선 타인이나 내가 무시했던 뜻밖의 사람의 인격을 통해서 하나님의 세밀한 메시지를 듣게 되는 반전의 순간들입니다.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 혹은 영적으로 전혀 무지해 보이는 이들이 툭 던진 짧은 한마디의 언어나, 길거리에서 마주한 전혀 예상치 못한 낯선 이의 따뜻한 배려와 손길이, 내가 수개월 수년 동안 골방에서 눈물 흘리며 붙잡고 씨름하던 인생의 무거운 난제에 대한 확실한 하늘의 해답이 되어 내 심장을 거칠게 뒤흔들 때가 참 많습니다. 성경의 위대한 지도자 모세 역시 인생의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이 예상치 못한 뜻밖의 사람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반전의 손길을 마주했습니다.
"모세가 그의 장인의 목소리를 듣고 그 모든 말대로 하여... 모세가 이스라엘 무리 중에서 능력 있는 사람들을 택하여 그들을 백성의 우두머리 곧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과 십부장을 삼으매"
(출애굽기 18:24-25)
모세는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전능자를 직접 대면했고, 애굽의 열 가지 재앙과 홍해를 가르는 초자연적인 기적을 온몸으로 지휘했던 이스라엘 최고의 영적 거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출애굽 한 수백만 명의 이스라엘 백성을 아침부터 저녁까지 혼자 재판하느라 영육 간에 완전히 방전되어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던 모세에게, "네가 하는 방식은 옳지 못하다. 현명한 자들을 세워 짐을 나누어라"고 날카롭게 책망하며 완벽한 목회 행정의 해답을 제시해 준 인물은 거룩한 선지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총회에 속하지도 않았던 미디안 광야의 이방 족장이자 모세의 장인이었던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방인의 입술과 지혜라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통로를 빌려, 위대한 지도자 모세의 사역의 무거운 짐을 가볍게 벗겨내 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전능자의 기묘한 일하심의 순간들은, 하나님은 결코 우리가 스스로 정해놓고 제한해 버린 목회자나 성도라는 좁은 종교적 파이프라인을 뛰어넘어, 이 땅의 우주 만물과 믿지 않는 영혼들까지도 얼마든지 당신의 거룩한 도구로 삼아 일하실 수 있는 무한하신 분임을 우리에게 명백하게 증명해 줍니다. 우리는 내 알량한 영적 자만심에 사로잡혀 내 주변 사람들을 내 기준대로 판단하고 정죄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귀를 스스로 닫아버릴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처음에는 그 하찮아 보이는 만남과 낯선 이의 쓴소리가 도대체 내 인생에 무슨 영적 의미가 있는지 전혀 깨닫지 못해 거부감을 느끼지만, 시간이 흐른 뒤 영적인 퍼즐이 맞춰진 상태에서 삶을 돌아보면 그것이야말로 나를 살리시고 바른길로 인도하시기 위해 주님이 예비해 두셨던 가장 세밀하고 정확한 하늘의 오케스트라와 같은 이끄심이었음을 고백하며 무릎 꿇게 됩니다. 그러므로 내 주변의 모든 스쳐 지나가는 인연과 뜻밖의 배려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을 마주하는 영적 겸손함을 소유하시기를 바랍니다.
3. 지극히 평범하고 반복되는 비린내 나는 일상적인 순간 속에서 불쑥 찾아오시는 하나님
마지막 세 번째로 우리가 하나님을 가장 경이롭게 발견하게 되는 처소는, 거대하고 초자연적인 종교 집회나 환상 속이 아니라, 우리가 매일 지겹도록 반복하는 지극히 평범하고 눈물겨운 일상생활의 한복판입니다. 매일 아침 거친 도로 위를 꽉 막혀 운전하다가, 산더미처럼 쌓인 주방의 그릇들을 설거지하다가, 혹은 지친 몸을 이끌고 집 앞 공원을 터덜터덜 산책하는 지극히 무감각한 순간에 갑자기 하늘의 압도적인 임재와 보혈의 은혜가 내 심장 가운데 왈칵 강물처럼 밀고 들어오는 신비로운 영적 조명을 경험하게 됩니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고 무방비 상태였던 내 삶의 현장에서 찾아오신 주님이시기에, 그 임재의 기억은 우리 영혼의 뼈대 속에 지워지지 않는 거대한 낙인처럼 가장 강력하고 영원하게 새겨집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수제자가 될 베드로를 부르실 때 바로 이 비린내 나는 일상의 현장을 전격 격파하셨습니다.
"예수께서 한 배에 타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누가복음 5:3-8)
베드로는 거룩한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율법을 낭독하다가 메시아를 만난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는 매일 밤샘 노동을 하며 땀 흘렸으나 단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해 인생의 지독한 무기력함과 씁쓸함을 삼킨 채, 갈릴리 바닷가 차가운 바닥에 앉아 그물 쪼가리를 씻고 있던 지극히 피곤하고 비린내 나는 생업의 현장 한복판에서 예수님을 마주했습니다. 내 삶의 익숙한 일터에 불쑥 찾아오사 "깊은 곳에 그물을 내리라" 명령하시고 그물이 찢어지도록 기적을 베푸시는 예수의 권능 앞에, 베드로는 내 눈앞에 계신 분이 한낱 인간이 아니라 온 우주 만물의 주인이신 살아계신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온몸의 소름 돋는 전율로 마주하며 엎드렸습니다.
이 거룩한 베드로의 부르심의 사건은, 하나님은 거룩한 종교적 장소나 정해진 예배 시간에만 갇혀 계시는 박물관의 우상이 아니라, 내가 먹고살기 위해 치열하게 악을 쓰며 살아가는 내 지저분한 일터와 직장, 부엌과 도로 위의 모든 순간순간마다 성령으로 시퍼렇게 살아 숨 쉬며 동행하고 계시는 인격적인 아버님이심을 확증합니다. 우리는 자꾸만 일요일의 종교 행위가 끝나면 하나님을 교회 의자 밑에 고이 접어두고,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의 삶은 하나님 없는 고독한 무신론자처럼 내 힘으로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곤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설거지하는 물소리 속에서, 막히는 차 안의 한숨 소리 속에서, 일터의 거친 컴퓨터 자판 소리 속에서 당신의 세밀한 사랑의 숨결을 불쑥 나타내어 보이십니다. 내가 처한 모든 일상의 공간이 곧 살아계신 하나님을 대면하는 거룩한 성막이자 지성소임을 깨달을 때, 우리의 메마르고 지쳐있던 하루하루는 날마다 하늘의 임재가 숨 쉬는 경이로운 예배의 처소로 완벽하게 대전환되는 축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맺는 말
결론적으로 우리가 믿는 전능하신 하나님은 결코 인간이 짜놓은 얄팍한 상식과 고정관념의 틀에 갇혀 움직이시는 나약한 분이 절대 아닙니다 . 주님은 세상의 도움을 전혀 청할 수 없어 홀로 눈물 흘리던 인생의 가장 깊은 밑바닥 낮은 자리에서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고 선명한 구원의 빛으로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 또한 내 영적인 자만심을 깨부수기 위해 내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뜻밖의 사람과 낯선 이의 입술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당신의 완전한 해답을 들려주시는 묘수와 반전의 하나님이십니다 . 나아가 주일의 성전 문을 뛰어넘어, 우리가 숨 가쁘게 살아가는 월요일의 직장과 막히는 도로 위, 주방의 평범한 일상의 순간마다 불쑥 임재의 파도를 던지사 우리의 삶 전체를 거룩한 지성소로 빚어가시는 신실하신 아버지이십니다 .
새로운 한 주간을 시작하며 일터의 거친 무게 앞에 직면해 계십니까? 내가 정해놓은 좁은 신앙의 통로와 고정관념을 십자가 앞에 완전히 파쇄해 버리십시오. 오늘 밤, "주님, 내가 생각지도 못한 낮은 자리에서도, 뜻밖의 인연 속에서도, 내 피곤한 일상의 한복판에서도 살아 계셔서 나를 부르시는 창조주 주님을 알아보는 영적인 눈을 활짝 열어주옵소서"라고 겸손히 묵상하십시오. 우리가 마음의 빗장을 열고 예상치 못한 순간에 불쑥 찾아오실 주님의 은혜를 기대하며 믿음의 눈을 들어 사방을 바라볼 때, 우리의 척박했던 광야 인생은 하나님의 거룩한 기적과 완전한 인도하심이 날마다 춤을 추는 영원한 안식의 처소로 완벽하게 변화되기 시작할 것입니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내 짧은 신앙 경험과 이기적인 고정관념이라는 조그만 상자 속에 전능하신 주님의 주권을 가두어 두려 했던 나의 영적인 교만과 무지함을 십자가 앞에 솔직하게 고백하며 내려놓습니다. 인생의 가장 처절한 바닥인 낮은 자리에 홀로 버려진 것만 같아 무서워 울고 있을 때, 오히려 그 부서진 마음의 중심 가장 가까운 곳에 찾아오사 죄책감과 상흔의 사슬을 끊어주시는 중보자 예수의 무한하신 용서의 보혈을 의지하게 하소서 .
내 알량한 자만심으로 주변 사람들을 함부로 정죄하지 않게 하시고, 미디안 광야의 이드로를 통해 모세의 사역의 짐을 벗기셨던 것처럼 내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뜻밖의 이웃과 낯선 타인의 입술을 통해서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세밀한 인도하심을 겸손히 경청하는 귀를 열어주소서 . 주일의 예배 자리를 넘어 막히는 도로 위에서, 주방의 설거지통 앞에서, 피곤한 일터의 거친 자판 소리 속에서 불쑥 임재의 파도를 던지사 물고기를 채우셨던 주님을 날마다 인격적으로 대면하게 하소서 .
내가 처한 일상의 모든 시공간이 곧 창조주 주님과 사랑의 대화를 나누는 거룩한 성막임을 깨달아, 언제 어디서나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찾아오실 주님의 은혜를 기대하며 승리하는 명품 인생이 되게 하소서. 나를 향한 구원의 계획을 단 한 순간도 멈추지 않으시는 좋으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본 글은 개인적인 신앙 경험과 성경 말씀 묵상을 바탕으로 작성된 칼럼입니다. 교단이나 특정 단체에 대한 판단은 공신력 있는 교단 기관의 입장을 함께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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