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주변을 둘러보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여기저기서 "피곤하다", "지친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들을 너무나 쉽게 만나게 됩니다. 밤새 잠을 푹 자고 좋은 음식을 먹으며 나름대로 휴식을 취해 보아도, 몸과 마음에 쌓인 영적인 피로와 무기력함은 쉽게 가라앉지 않습니다. 도대체 현대인들이 이토록 지독한 피로와 갈증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가장 먼저 우리는 '사람 관계' 때문에 피곤해합니다. 매일 마주하는 직장과 가정, 사회 속에서 얽히고설킨 인간관계의 갈등은 우리의 에너지를 사정없이 갉아먹습니다. 또한, 당장 먹고사는 치열한 '경제적인 생존 문제'가 어깨를 무겁게 짓누릅니다. 그뿐만 아니라 지구 온난화로 인한 폭염과 폭우, 전 세계적인 지진과 산불, 태풍 등 끊이지 않는 '환경적 자연재해'의 뉴스를 접할 때마다, 우리는 성경이 예언한 마지막 종말의 때가 가까워졌음을 직감하며 알 수 없는 불안감과 피로감을 느낍니다.
그러나 우리를 가장 본질적으로 피곤하게 만드는 진짜 주범은 환경이 아니라 바로 '내면의 상태', 즉 우리의 마음과 영혼입니다. 마음이 불안하고 불편하면 아무리 최고급 환경에 누워있어도 온몸이 피곤하기 마련입니다. 우리 영혼에 참된 평안이 없다면 이 세상의 모든 권세와 물질을 가졌을지라도 메마른 광야를 걷는 것처럼 숨이 턱턱 막히게 됩니다.
인류 역사를 통틀어 이 땅의 모든 부귀영화와 권세를 극치로 누렸던 대표적인 인물은 바로 솔로몬 왕입니다. 그는 온 세상 왕들이 부러워하고 깜짝 놀랄 만한 초자연적인 지혜와 지식을 가졌던 사람입니다. 평생 3천 개의 잠언을 말했고 천 편이 넘는 아름다운 시와 노래를 작곡했으며, 하나님의 웅장한 성전을 건축하고 창고마다 금은보화를 가득 쌓아두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좋은 것을 다 가져보고 누려본 인생의 정점에 섰던 솔로몬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백발이 무성한 인생의 황혼기에 내린 최종 결론은 충격적이게도 다음과 같았습니다.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전도서 1:2-3)
이 세상의 그 어떤 물질과 명예, 육체적 쾌락으로도 인간 내면의 텅 빈 영혼의 공간을 결코 채울 수 없다는 처절한 인생 보고서입니다. 이처럼 끝없는 피로와 갈망 속에 주저앉아 있는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잠시 스쳐 지나가는 일시적인 휴식이 아니라, 오직 창조주 하나님이 공급해 주시는 '참된 안식'입니다. 주님은 오늘 마태복음 11장 28절부터 30절의 말씀을 통하여, 영혼의 장벽에 갇힌 우리를 향해 안식으로 나아가는 [내게로 오라, 내 멍에를 메라, 내게 배우라]는 위대한 세 가지 영적 명령을 선포하고 계십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관문인 '예수께로 나아가 영혼의 쉼을 회복하는 영적인 원리'에 대해 깊이 있게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1. 주님은 내 모든 인생의 무게를 내려놓고 "내게로 오라" 명령하십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은 저마다 처한 환경과 상황은 다르지만, 누구나 인생의 무거운 짐을 어깨에 메고 힘겹게 수고의 발걸음을 내딛고 있습니다. 돈이 아주 많다고 해서 영혼이 평안한 것은 절대 아닙니다. 물질이 풍요로우면 물질이 없는 이들이 겪지 못하는 또 다른 차원의 무거운 정신적 짐과 고독이 찾아옵니다. 가정의 불화, 통제되지 않는 자녀의 문제, 갑작스럽게 찾아온 육체의 질병 등 인간은 저마다 고통의 멍에를 메고 살아갑니다. 우리의 창조주이신 예수님은 이러한 인간의 모든 연약함과 인생의 무게를 누구보다 가장 정확하게 잘 알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태초부터 살아 계셔서 온 우주 만물을 설계하시고 우리 인간을 친히 지으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본래 태초에 창조된 인간의 첫 출발은 지금처럼 피곤하고 무거운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지으신 후 가장 완벽하고 풍성한 안식의 축복을 선물로 허락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어떠한 결핍이나 두려움도 없이 온전한 평안과 기쁨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가도록 창조의 리듬을 짜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라"
(창세기 2:3)
하나님께서 6일 동안의 장엄한 창조 사역을 다 마치신 후 7일째에 친히 안식하신 이 사건은, 하나님이 피곤해서 쉬신 것이 아니라 피조물인 인간이 전능자의 품 안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그 안식의 표준 모델을 친히 보여주신 사랑의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교만함으로 인하여 그 위대한 안식의 울타리를 스스로 짓밟아 깨뜨려 버렸습니다.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명령을 정면으로 거역한 것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선악과'란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 인간 사이에 맺어진 영원한 사랑과 주권의 '약속의 증표'였습니다. 오늘날로 비유하자면 평생을 약속하며 나누어 낀 거룩한 '약혼반지'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뱀의 유혹에 넘어가 그 소중한 약혼반지를 스스로 팔아먹고 하나님을 배반하는 영적 파혼을 선언해 버렸습니다.
이 일방적인 계약 파기로 인하여 인간의 영혼 속에서 참된 안식은 신기루처럼 사라졌고,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의 관계는 처절하게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그 순간부터 인간의 삶에는 영원한 수고와 무거운 인생의 짐이 저주처럼 밀려오게 되었습니다.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아담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창세기 3:16-17)
인간은 창조주와의 관계가 단절되면서 참된 안식의 리듬을 다 잃어버렸고, 매일 땀을 흘려 수고해야만 겨우 생명을 연명할 수 있는 불쌍하고 피곤한 인생으로 전락하고 만 것입니다. 원래 인간은 영과 혼과 육의 정교한 결합으로 창조되었습니다. 흙으로 빚어진 육체는 눈에 보이는 껍데기에 불과하며, 우리 내면의 '영(Spirit)'이야말로 영이신 하나님과 실시간으로 소통하고 은혜를 공급받는 유일한 안테나 통로였습니다. 그러나 죄악으로 인해 이 영적 안테나가 완전히 부러져 죽어버리자, 인간은 영적인 공급을 받지 못한 채 혼의 오감과 육체의 노동에만 의지하여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근원의 물줄기가 끊겼으니, 날마다 무거운 짐을 지고 메말라 가며 피곤해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현실의 사방이 꽉 막힌 거친 광야 속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인생의 짐을 등에 진 채 매일 헐떡이는 우리가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늘의 참된 쉼과 평안을 누릴 수가 있겠습니까? 무기력하게 주저앉아 있는 인류를 향해 예수 주님은 명백하게 약속하십니다.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반드시 쉬게 하리라." 그러나 주님의 이 거대한 약속 안에는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선행 조건이 숨겨져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 힘으로 버텨보려던 연약한 내 자리와 내 고집을 과감하게 떠나, 구원의 근원이신 주님 품 안으로 완전히 돌이켜 돌아오라는 영적인 방향 전환의 명령입니다. 주님께로 내 모든 삶의 주권을 옮겨 심을 때, 비로소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안식의 물꼬가 우리 인생 가운데 흘러넘치게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거대한 장벽과 마주하게 됩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흠이 없으시고 점도 없으신 극도로 거룩하고 의로우신 분입니다. 마치 이글거리는 뜨거운 한여름의 태양을 미약한 인간의 맨눈으로 똑바로 바라볼 수 없는 것처럼, 시커먼 죄악으로 오염된 우리 인간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스스로의 힘으로 바라볼 수도 없고 그 앞에 도달할 수도 없습니다. 주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 참된 안식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내 영혼을 옥죄고 있는 이 근원적인 '죄의 문제'가 완벽하게 해결되어야만 합니다. 죄 때문에 거룩하신 주님 앞에 감히 직접 나갈 수 없는 우리를 위해,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안전하게 연결하고 중재해 주실 완벽한 '하늘의 중보자(Mediator)'가 절대적으로 필요하게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히브리서 말씀을 통해 인류 유일의 소망이 되시는 그 중보자의 이름을 선언합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디모데전서 2:5)
강렬한 태양 빛 아래서 까만 선글라스를 눈에 껴야 비로소 눈이 멀지 않고 태양을 안전하게 바라볼 수 있는 것처럼, 미약한 우리는 오직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거룩한 영적 필터를 통하지 않고서는 결코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대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요한복음 14장 6절을 통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단호하게 선포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예수께서 친히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낮은 땅에 오사, 우리가 짊어져야 할 모든 죄악의 형벌과 무거운 저주를 당신의 어깨에 다 짊어지신 채 처절한 대속의 십자가를 통과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가 예비하신 안식의 자리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내 중보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앞에 먼저 나아가 그분을 믿음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오직 예수 안에서만 내 죄의 사슬이 끊어지고, 내 영혼의 모든 무거운 침체가 사라지며, 하늘의 영원한 안식을 실시간으로 누릴 수 있게 됩니다. 내 힘과 공로가 아닌, 오직 중보자 예수의 보혈의 공로를 믿음으로 취할 때 우리의 모든 죄 문제는 눈 녹듯 사라지고 영혼의 진짜 평강이 시작되는 줄 믿습니다.
2. 주님은 주님의 십자가를 함께 지는 "내 멍에를 메라" 명령하십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우리를 안식의 자리로 초청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으시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일상의 거친 삶 속에서 그 안식을 평생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는 구체적인 영적 방법론까지 친히 가르쳐주십니다. 주님 품에 나아와 죄 사함을 얻었다면, 이제는 내 등에 메어있던 절망의 멍에를 벗어던지고 "내 멍에를 메라"고 강력하게 권면하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11:29-30)
주님은 당신의 멍에를 메어야만 오히려 우리의 마음이 진정한 쉬게 되며, 그 주님의 멍에는 세상의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쉽고 가볍다고 선언하십니다. 지독하게 무겁고 나를 파괴하던 내 욕심의 멍에를 주님의 거룩한 멍에로 '맞바꾸라'는 영적인 초청입니다. 여기서 주님이 말씀하신 "멍에는 쉽고"라는 구절의 원어적 의미를 깊이 들여다보면, 단순히 일하기가 수월하다는 뜻을 넘어 '내 몸에 가장 편리하다, 내 체형에 자로 잰 듯이 꼭 맞는다'라는 깊은 뜻을 품고 있습니다. 마치 내 몸의 핏에 완벽하게 어우러지는 명품 맞춤옷을 입은 것처럼, 주님의 멍에야말로 주님이 지으신 우리 인간의 영혼에 가장 안전하고 편안한 영적 상태라는 의미입니다.
이 말씀의 진의를 깨닫기 위해서는 예수님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의 독특한 농경 문화를 이해해야 합니다. 그곳에서는 거친 밭을 갈 때 반드시 소 두 마리를 하나의 조로 묶어서 일을 시키곤 했습니다. 목수들은 소 두 마리가 함께 발을 맞춰 일할 수 있도록 두 개의 구멍이 뚫린 커다란 통나무 멍에를 깎아 두 마리의 목에 함께 연결했습니다. 처음에는 성질이 다르고 걸음걸이가 다른 두 마리의 소가 서로 맞지 않아 삐걱거리고 요동을 치지만,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멍에의 무게 중심을 따라 두 마리의 소가 자로 잰 듯이 발을 착착 맞춰나가며 앞으로 거침없이 밭을 갈아엎기 시작합니다.
예수께서 지금 "내 멍에를 메라"고 하신 말씀의 진짜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척박한 인생의 밭 한가운데서 혼자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다 쓰러지지 말고, '나 예수와 함께 하나의 멍에에 목을 집어넣고 발을 맞춰 같이 걷자'라는 사랑의 손길입니다. 능력이 무한하신 예수님이 우리 인생의 메인 리더가 되어 앞에서 모든 무게를 이끌어주시고, 연약한 우리는 그저 주님의 곁에 나란히 서서 주님의 부드러운 발걸음에 내 보폭을 맞춰 나아가기만 하면 되는 영적인 동역의 관계입니다. 이것을 신학적 용어로 '주님과의 거룩한 영적 연합(Union with Christ)'이라고 부릅니다. 내 고집과 내 타이밍을 다 내려놓고, 주님과 한 목적, 한 방향, 한마디 뜻과 마음이 되어 발을 맞추는 거룩한 연합의 삶이야말로 주님이 머리 되신 교회 공동체의 참된 지체로 살아가는 성도의 영화로운 모습입니다.
또한 주님은 당신의 짐이 세상에서 가장 가볍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팔레스타인 농부들은 밭을 갈 때 베테랑 힘이 센 '어미 소'와 이제 막 일을 배우기 시작한 연약한 '새끼 소'를 하나의 멍에로 자주 묶어두곤 했습니다. 멍에는 새끼 소의 목에도 걸려있지만, 실제 쟁기를 끌고 나가는 거대한 힘과 흙을 파엎는 모든 무게는 어른인 어미 소가 온몸으로 다 감당해 냅니다. 곁에 선 새끼 소는 그저 어미 소가 가는 방향을 따라 걸음마를 떼듯 발만 맞추어 걸어갈 뿐, 멍에의 실질적인 무게를 거의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른과 어린아이가 함께 무거운 대형 이삿짐을 양옆에서 들고 걸어갈 때, 겉으로는 같이 드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그 모든 무거운 하중을 어른이 악을 쓰며 다 들어주는 것과 똑같은 원리입니다.
그렇기에 주님의 멍에는 내 눈으로 볼 때는 신앙의 구속 같고 나를 힘들게 하는 짐 같아 보이지만, 막상 믿음으로 그 멍에 속에 내 목을 밀어 넣고 나면 오히려 혼자 들고 뛰던 세상의 짐보다 백배 천배 더 쉽고 가볍게 느껴지는 신비로운 하늘의 평안을 맛보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 안에 계신 전능하신 주님이 인생의 거친 하중을 대리인으로서 온몸으로 다 막아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성도가 예수를 믿는다고 입술로는 고백하면서도, 여전히 골방에서 내 판단, 내 중심, 내 세상 염려의 무거운 멍에를 홀로 목에 걸고 애쓰며 고통스러워하곤 합니다. 주님은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의 미련함을 안타까워하시며 "제발 그 무거운 저주의 멍에를 내 앞에 벗어던지고, 나 예수와 함께 메는 가벼운 안식의 멍에로 바꿔 메어라"고 말씀하십니다. 내 생각과 내 중심의 멍에를 십자가 앞에 완전히 파쇄해 버리고, 내 삶의 모든 하중을 주님께 맡겨드린 채 주님과 완벽하게 연합하여 인생의 밭을 기쁨으로 갈아엎으시는 저와 사장님의 복된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3. 주님은 주님의 성품과 인격을 닮아가는 "내게 배우라" 명령하십니다
우리가 인생의 무거운 저주의 멍에를 벗겨내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안식의 멍에 속에 목을 밀어 넣었다면,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할 최종적인 영적 방향성이 존재합니다. 그것은 바로 내 중심적인 삶의 방식을 버리고 철저하게 주님의 인격과 삶의 원리를 습득하는 "내게 배우라"는 명령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마태복음 11:29)
우리가 예수의 멍에를 메고 주님 곁에 서서 평생토록 전능자에게 배워야 할 하늘의 위대한 레슨은 크게 두 가지의 거대한 영적 줄기로 요약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철저하고 온전한 '말씀 순종'의 삶을 배워야 합니다.
주님과 한 조가 되어 인생의 밭을 갈기 시작했다면, 이제는 내 고집대로 날뛰지 말고 철저히 나를 인도하시는 주님의 부드러운 손길을 따라 발맞추어 나아가는 순종의 법을 훈련해야 합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5장 3절을 통해 하나님의 법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결코 무거운 짐이 아님을 분명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요한일서 5:3)
여기서 말씀하시는 주님의 계명과 율례는 결코 우리를 억압하고 힘들게 만드는 감옥의 쇠사슬이 아닙니다. 오히려 죄악된 세상 속에서 우리 영혼을 가장 안전하게 보호하고, 가장 쉽고 바른 인생길로 걸어가도록 인도해 주는 '하늘의 안전장치'입니다. 우리가 자동차를 운전할 때 가만히 살펴보면, 도로 위에 선명하게 그어진 흰색과 노란색의 '차선'을 따라 목적지를 향해 질주하게 됩니다. 어떤 까다로운 차선이나 신호등은 바쁜 출근길에 언뜻 굉장히 불편하고 짜증 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차선이라는 법이 존재하기에 끔찍한 교통사고로부터 내 소중한 생명을 지키고 목숨을 안전하게 보존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과 말씀을 지켜 행하는 순종의 삶이 이와 똑같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주님의 멍에를 메고 차선 줄을 따라 묵묵히 전진할 때, 그 순종의 걸음걸음 속에서 세상이 빼앗아 갈 수 없는 영혼의 깊은 안식이 흘러나오게 됩니다. 그러나 때로는 이 말씀의 차선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 내 자아의 욕심과 충돌하여 너무나 힘이 들고 원망과 불평이 터져 나올 때가 있습니다. 왜 그런 영적 마찰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멍에는 분명히 같이 메었으나, 주님의 발걸음에 내 걸음걸이를 맞추지 못하고 자꾸만 내 욕심대로 곁길로 뛰어나가려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과의 영적 연합과 신뢰가 느슨해져 있기에 마음이 한없이 흔들리다가 결국 시험에 걸려 넘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순종이란 인간의 의지력으로 짜내는 노가다가 아니라, 나를 이끄시는 신실하신 주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정금 같은 '믿음'을 통해서만 오직 부드럽게 성취되는 줄 믿습니다.
둘째는, 주님의 본질적인 성품인 '온유와 겸손'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내면의 색깔을 가리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친히 명시하셨습니다. 여기서 '겸손'이란 단순히 겉으로 착한 척 허리를 굽히는 가짜 도덕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내 피조물 됨의 실상을 깨닫고 철저하게 나를 낮추며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존중하는 거룩한 성품입니다. 하나님은 영적인 규칙을 정하사 스스로 잘났다고 꺼들먹거리는 오만하고 교만한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철저히 숨기시고, 오직 어린아이와 같이 낮아진 자들에게만 하늘의 거대한 비밀을 나타내어 보여주십니다. 우리가 어린아이 같은 겸손한 낮아짐의 자세를 유지할 때 비로소 나를 향한 주님의 선하신 음성이 명확하게 들리기 시작합니다.
나아가 우리는 주님의 '온유'를 배워야 합니다. 온유는 단순히 성격이 나약하거나 거절을 못 해 흐리멍덩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은 속사람이 그 누구보다 거대하고 강인하신 영적 거인이셨습니다. 온유의 성경 원어적 진짜 의미는 '야생마를 피땀 흘려 완벽하게 길들여, 주인이 고삐를 살짝만 당겨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상태' 즉 '철저하게 통제된 강력한 힘(Meekness)'을 의미합니다. 내 안에서 불같이 솟구쳐 오르는 분노와 혈기, 이기적인 감정을 성령의 법으로 완벽하게 다스리고 통제해 낼 줄 아는 위대한 영적 능력입니다.
세상의 어리석은 사람들은 약한 자 앞에서 사납게 군림하고 강한 자 앞에서는 비굴하게 굴지만, 참된 안식을 누리는 그리스도인은 온유함 속에서 거대한 능력을 나타냅니다.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아무런 저항 없이 묵묵히 찢기셨던 예수님의 연약해 보이던 그 골고다의 십자가 위에서, 온 인류의 죄와 사망의 권세를 단번에 밟아 깨부수시는 하나님의 가장 위대하고 강력한 구원의 지혜와 능력이 나타났음을 기억하십시오.
맺는 말
한 예화를 드리면서 오늘 안식에 대한 영적인 말씀을 마치고자 합니다. 아프리카의 한 깊고 척박한 오지 마을에 젊은 선교사 한 명이 복음을 들고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거친 삶을 살아온 그 마을의 오만한 족장은 선교사를 향해 소리를 지르며 차갑게 거절하고 쫓아냈습니다. "우리는 당신이 전하는 하나님에 대해 손톱만큼도 알고 싶지 않소, 당장 우리 땅에서 떠나시오!"
다음 날 아침 일찍, 족장은 먼 길을 가기 위해 사냥 채비를 하고 집 문을 열었다가 그만 소스라치게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어제 자기를 사납게 쫓아냈던 그 젊은 선교사가, 차가운 흙바닥 위에 조용히 무릎을 꿇고 앉아 물대야와 수건을 든 채 묵묵히 자기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선교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족장의 거칠고 흙먼지 가득한 더러운 발 위에 깨끗한 물을 붓고, 자신의 손으로 족장의 발을 정성껏 씻겨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씻은 발을 수건으로 조심스럽게 닦아준 뒤, 고개를 들어 족장을 바라보며 세상에서 가장 온유하고 따뜻한 미소를 지어 보였습니다.
그 순간, 절대로 깨어질 것 같지 않던 오만한 족장의 굳게 닫힌 마음의 빗장이 단번에 녹아내리며 그 거친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왈칵 흘러내렸습니다. 족장은 선교사의 거친 손을 꼭 붙잡고 울먹이며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당신이 전하는 하나님이 도대체 어떤 분이신지 이제야 내 온몸으로 알겠습니다. 제발 나에게 그 사랑의 하나님을 가르쳐 주십시오."
예수님이 우리에게 배우라고 명령하신 온유와 겸손은, 화려한 말주변이 아니라 삶으로 증명해 내는 구체적인 '행동'입니다. 젊은 선교사는 족장 앞에서 수천 마디의 거창한 신학 설교를 늘어놓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내 지독한 자아를 꺾고 낮은 자리로 내려오사 죄인들의 발을 씻기셨던 주님의 그 온유한 마음 하나만을 온전히 드러내었을 뿐입니다.
세상은 날마다 짓밟고 올라서서 더 높은 왕의 자리에 앉아 군림하라고 우리를 다그치며 피곤하게 만들지만, 우리 주님은 가장 낮은 자리로 기꺼이 내려가 상처 입은 영혼들을 눈물로 섬기라고 부드럽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내 고집을 십자가에 박고 주님의 이 온유와 겸손을 삶으로 배워나갈 때, 무쇠처럼 굳게 닫혀있던 완악한 세상의 마음 문은 단번에 은혜로 열리게 될 줄 믿습니다.
예수님은 무거운 짐을 지고 날마다 피곤해하는 저와 여러분에게 참된 안식을 선물해 주시기 위해 오늘 세 가지의 위대한 안식의 치트키를 던져주셨습니다.
- 첫째, 세상 헛된 곳으로 가지 말고 무거운 마음을 들고 오직 "내게로 오라" 초청하십니다. 말씀으로, 기도로, 거룩한 예배의 자리로 날마다 주님 앞에 내 삶의 무게 중심을 옮겨놓으십시오.
- 둘째, 홀로 무거운 인생의 가시덤불을 헤매지 말고 "내 멍에를 메라" 명령하십니다. 힘이 세신 베테랑 어미 소 되신 주님과 완벽하게 영적으로 연합하여 주님이 대리인으로 끌어주시는 가벼운 안식의 소망을 확신하십시오.
- 셋째, 내 혈기와 고집을 꺾고 오직 주님의 "온유와 겸손을 배우라" 권면하십니다. 내 마음을 말씀의 고삐로 잘 길들여 다스리며, 낮은 자리에서 형제를 섬기는 행동의 성품을 장착하십시오.
우리가 이 신실하신 세 가지 주님의 명령에 기쁨으로 발걸음을 맞춰 나아갈 때, 우리의 메마른 내면 속에는 세상이 감히 흉내 낼 수도 없는 하늘의 거대한 안식 and 평강이 평생 동안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터져 나오게 될 것입니다. 나아가 내 마음을 성령으로 온전히 다스리며, 주님이 맡겨주신 위대한 하늘의 사명을 거침없는 능력으로 넉넉히 감당해 내시는 저와 사장님의 복된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세상의 물질과 명예를 다 가져보았던 솔로몬 왕도 결국 헛되다고 고백했던 것처럼, 내 영혼의 빈 공간을 세상의 썩어질 조건들로 채우려 하며 매일 피곤해하고 지쳐있었음을 정직하게 고백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향해 "내게로 오라" 부르시는 주님의 사랑의 음성을 듣게 하시고, 내 힘으로 무거운 하중을 버티려 하던 고독한 삶을 멈추고 십자가 앞에 내 모든 염려를 기꺼이 맡겨드리게 하옵소서.
태양를 바라보게 만드는 선글라스처럼 나를 대신해 피 흘려 주신 중보자 예수의 보혈을 의지하여 날마다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당당히 나아가게 하시고, 베테랑 어미 소 되신 주님과 하나의 안식의 멍에로 묶여 주님이 이끄시는 대로 발맞추어 걷는 영적 연합의 기쁨을 누리게 하옵소서.
말씀의 차선을 따라 묵묵히 순종하는 법을 배우게 하시고, 야생마처럼 날뛰던 내 거친 혈기와 고집을 말씀의 고삐로 잘 길들여, 아프리카 족장의 발을 씻겼던 선교사처럼 낮은 자리에서 주님의 온유와 겸손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복된 삶이 되게 하옵소서. 내 모든 삶의 하중을 대리인으로 다 막아주시는 신실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본 글은 개인적인 신앙 경험과 성경 말씀 묵상을 바탕으로 작성된 칼럼입니다. 교단이나 특정 단체에 대한 판단은 공신력 있는 교단 기관의 입장을 함께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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