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는 받는 순간에는 선명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조금씩 희미해지는 성질이 있습니다. 어려운 시기를 지나 한숨 돌리고 나면, 그토록 간절히 구하던 도움이 처음부터 당연했던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는 일보다 은혜를 기억하는 일이 어쩌면 더 어려운 신앙의 훈련일지 모릅니다. 오늘은 은혜를 잊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서 발견되는 네 가지 태도를 함께 나눠보려 합니다.

1. 은혜를 잊지 않는 사람은 기억할 표지를 세웁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마른 땅처럼 건넌 뒤, 하나님은 강 한가운데서 열두 개의 돌을 가져다 세우게 하셨습니다. 훗날 자손들이 "이 돌들이 무슨 뜻이냐" 묻거든 그 이야기를 들려주라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이것이 너희 중에 표징이 되리라 후일에 너희의 자손들이 물어 이르되 이 돌들은 무슨 뜻이냐 하거든 그들에게 이르기를 요단 물이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서 끊어졌나니 곧 언약궤가 요단을 건널 때에 요단 물이 끊어졌으므로 이 돌들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영원히 기념이 되리라 하라 하니라” (여호수아 4:6-7)
하나님은 기적을 베푸신 것으로 끝내지 않으시고, 그 기적을 기억할 수 있는 장치까지 마련하게 하셨습니다. 이는 사람의 기억이 얼마나 쉽게 흐려지는지를 하나님이 누구보다 잘 아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기념의 돌이 필요합니다. 어떤 분은 응답받은 기도를 날짜와 함께 노트에 적어두고, 어떤 분은 위로받았던 말씀 구절에 그날의 일을 짧게 메모해 둡니다. 가족이 모일 때마다 올해 받은 은혜를 한 가지씩 나누는 시간을 갖는 가정도 있습니다. 방법은 달라도 핵심은 같습니다.
저의 경우도 신앙을 처음 갖었을때 기록했던 30여년 전의 노트를 아직도 보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때 정말 열심히 기도했던 기도제목을 매달매달 10개정도 메모해 놓고 몇 달이 지나서 응답을 확인해보면 거의 6-70%정도가 응답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어렵고 힘든 일들을 만나면 그 기록들을 펼쳐서 보게되고 그러한 증거들이 내게 큰 위로와 소망을 안겨주고 다시금 일어서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은혜를 마음에만 두지 않고 눈에 보이는 형태로 남겨두는 것입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시편 103:2)라는 고백은 잊지 않으려는 의지적인 다짐에서 나온 노래입니다. 표지를 세운 사람은 훗날 광야 같은 시간을 만났을 때, 그 돌을 바라보며 그때도 하나님이 나를 건너게 하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나온 은혜의 기록은 오늘의 불안을 잠재우는 가장 현실적인 위로가 됩니다.
2. 은혜를 잊지 않는 사람은 감사를 말과 행동으로 표현합니다
열 명의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고침을 받았지만, 그중 한 사람만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했습니다. 열 사람 모두 같은 은혜를 입었는데도 감사의 표현으로 이어진 것은 한 사람이었다는 점이 우리를 돌아보게 합니다. 그러자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누가복음 17:17)
마음속으로 고마워하는 것과 그 마음을 입으로 고백하는 것 사이에는 생각보다 큰 거리가 있습니다. 고마운 마음이 있어도 표현하지 않으면 시간이 지나면서 그 마음마저 희미해지기 쉽습니다. 반대로 감사를 소리 내어 말하는 사람은 말하는 동안 은혜의 내용을 다시 한번 떠올리게 됩니다. "여호와의 구속을 받은 자는 이같이 말할지어다"(시편 107:2)라는 말씀도 구원받은 사람이 입을 열어 고백하도록 권합니다.
감사의 표현은 하나님께만 향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전해준 사람들에게도 이어져야 합니다. 힘들 때 곁에 있어준 사람에게 늦게라도 전화를 걸어 고마웠다고 말하는 것, 짧은 편지 한 장을 써서 건네는 것이 그런 표현입니다. 우리들은 감사의 말에 참 인색합니다. 그러나 그런 표현이 처음엔 어색하게 느껴질지 몰라도 입에 붙고 습관이 되면 이런 표현은 상대에게 힘이 될 뿐 아니라 나 자신에게도 은혜를 확인하는 시간이 됩니다. 감사를 표현하는 습관이 자리 잡으면, 은혜는 기억 속에 머물지 않고 삶 속에서 계속 살아 움직이게 됩니다.
3. 은혜를 잊지 않는 사람은 받은 은혜를 거저 흘려보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내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마태복음 10:8)
은혜는 받은 사람에게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다시 다른 사람에게로 흘러가도록 주어진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큰 도움을 받았는지 기억하는 사람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지나치기가 어렵습니다. 한때 길을 잃고 헤맸던 사람이 길 잃은 사람의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 능히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위로하게 하시는 하나님"(고린도후서 1:4)이라고 고백했습니다. 내가 받은 위로가 다른 사람을 위로하는 재료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흘려보낼 때 은혜는 훨씬 더 선명하게 기억에 남습니다. 거창한 봉사가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어려운 일을 겪는 이웃에게 따뜻한 밥 한 끼를 대접하는 일, 같은 아픔을 지나는 사람에게 내 경험을 조용히 들려주는 일이 모두 은혜를 흘려보내는 방법입니다. 흘려보내는 사람의 마음에는 오히려 은혜가 마르지 않고 더 풍성하게 채워집니다. 그러나 그 은혜가 내게 계속 머물러만 있다면 그 은혜는 고인 물이 썩어 냄새가 나는 것처럼 은혜는 점차로 사라지고 그 자리엔 악취만 남게 될 것입니다.
‘은혜가 다스리는 삶’이란 책을 지은 저자 스티브 맥베이는 책의 본문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힘으로 하나님의 복을 받고 영적 성장을 이루려고 안간힘을 쓴다. ‘공짜’없는 세상에서 조건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모든 은혜를 예수 그리스도라는 하나의 선물에 담아 우리에게 주셨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 힘으로 열심히 살려는 생각을 내려놓고 생명이신 예수님을 의지하기를 바라신다”
4. 은혜를 잊지 않는 사람은 은혜 앞에서 겸손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고린도전서 15:10)
많은 일을 이루어낸 사람이면서도 그 모든 것의 출발점을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은혜에 두었습니다. 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고린도전서 4:7)라는 질문은 우리가 가진 것들의 출처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건강도, 가족도, 지금까지 지켜온 신앙도 돌아보면 누군가의 도움과 하나님의 인도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은혜를 잊는 사람은 어느새 모든 것을 자기 힘으로 이룬 것처럼 생각하게 되고, 그때부터 마음에 교만이 자리 잡습니다. 반대로 은혜를 기억하는 사람은 성공한 순간에도 조용히 고개를 숙일 줄 압니다. 이 겸손은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서 드러납니다. 자기보다 어려운 사람을 쉽게 판단하지 않고, 실수한 사람을 향해 쉽게 돌을 들지 않게 됩니다. 나 역시 은혜로 서 있는 사람이라는 자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은혜 앞에 겸손한 사람은 하나님께도 사람에게도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습니다.
맺는 말
은혜를 잊지 않는 사람은 기억할 표지를 세우고, 감사를 말과 행동으로 표현하며, 받은 은혜를 거저 흘려보내고, 은혜 앞에서 겸손합니다. 오늘 하루, 최근에 받은 은혜 한 가지를 떠올려 짧게 기록해 보시길 바랍니다. 작은 기록 하나가 훗날 큰 위로가 될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제가 받은 은혜를 쉽게 잊어버리는 연약한 존재임을 고백합니다. 지나온 길마다 함께하신 주님의 손길을 기억하게 하시고, 그 감사를 입술과 삶으로 표현하게 하소서. 거저 받은 은혜를 거저 흘려보내는 사람이 되게 하시며, 언제나 은혜 앞에 겸손하게 서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본 글은 개인적인 신앙 경험 and 성경 말씀 묵상을 바탕으로 작성된 칼럼입니다. 교단이나 특정 단체에 대한 판단은 공신력 있는 교단 기관의 입장을 함께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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